지식이 무기가 되었던 하와이의 밤
하와이 호놀룰루 칼리히지역
좁은 판자촌의 밤은 일찍 닫혔다.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과 세탁소에서 땀을 흘리던 교민들이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지만, 양재준의 등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세탁소 구석 다다미 위, 그는 조심스레 책자 한 권을 펼쳤다.
그것은 『태평양잡지』였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고, 이승만 박사가 직접 편집을 맡았던 잡지. 표지는 투박했고 종이는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조선의 운명과 미래를 향한 글들이 빛나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은 지식에서 시작된다. 뭉쳐서 단결해야 이룰 수 있다.”
잡지 속 문장은 불씨와 같았다. 글자를 따라 내려갈수록, 양재준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처음엔 혼자 읽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이웃 청년들이 세탁소 문을 두드렸다.
“재준 형, 글자는 잘 모르지만… 읽어 주세요. 무슨 말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잡지를 들고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청년들은 숨을 죽이고 귀 기울였고, 문장의 뜻을 따라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글을 모르는 이들도 그 울림을 이해했다.
판자촌의 좁은 방 안, 희미한 석유등불 아래에서 청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는 그 순간, 잡지의 글은 활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의 가슴속 불이 되었다.
그 무렵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체류하며 교회와 학교, 각종 집회를 통해 교민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잡지 속 글을 넘어, 직접적인 울림으로 다가왔다. 양재준도 몇 차례 그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조선 사람들아, 우리가 무지하면 일본은 더욱 우리를 얕본다.
배워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싸워야 합니다.”
그 말은 벼락처럼 양재준의 가슴을 때렸다.
그날 이후 그는 세탁소에서 손을 멈추고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독립은 단순히 총과 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는 것’이 힘이었다. 배움이 무기였다.
그 후, 양재준의 세탁소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작은 서당’이라 불렀다.
낡은 잡지 몇 권, 손때 묻은 한글 교재, 그리고 양재준의 끈질긴 목소리가 전부였지만, 그곳은 뜨겁고도 진지한 배움의 공간이었다.
수양딸과 그의 남편은 청년들에게 글자를 가르쳤고,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태평양잡지』 속 글을 풀어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건 단순히 일본을 비난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거야. 우리가 무지하면 남의 나라 발밑에서 벗어날 수 없어.”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혔다. 잡지 한 권은 수십 번도 넘게 읽혀 손때가 묻어 더 이상 장을 넘기기 힘들어질 때까지 사람들의 손을 거쳤다.
양재준에게는 물려줄 자식도, 곁을 지켜줄 혈육도 없었다. 그러나 잡지를 읽고, 글을 배우고, 그것을 나누는 시간은 곧 새로운 가족이자 스승이 되어주었다.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희망의 불씨는 그렇게 하와이의 밤마다 타올랐다.
등잔불은 약했지만, 그 불빛 속에서 교민들은 새로운 길을 찾았다.
지식은 총이었고, 사상은 칼이었다. 『태평양잡지』는 그들에게, 나라 없는 백성도 여전히 싸울 수 있다는 증거였다.
[역사적 배경]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약 7,200여 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그들은 미국의 전략 산업이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며 미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실성과 근면성, 그리고 강한 애국심은 미국 사회와 정·재계에까지 알려져 한인들을 높이 평가하게 했다.
그러한 긍정적 평판은 훗날 6.25 전쟁참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도 우호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