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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늙은 이민자, 고독한 1세대

고향은 멀어지고, 동지는 사라졌다

by 영 Young

1940년대 초, 호놀룰루 외곽의 작은 주택가다. 말수가 줄어든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양재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가 처음 하와이 땅을 밟았을 때 함께 웃고 울던 동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병으로, 사고로, 무관심 속에서 흩어져 이름조차 잊힌 이들이 많았다. 부고로 들려오는 이름마다 그의 지난날이 스러졌다. 사탕수수밭에서 등을 맞대던 동무들, 독립자금을 봉투에 담던 손길들, 그들의 기록은 세상에서 하나둘 지워지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의 소식이 멀리서 전해졌다. 그러나 그의 손마디는 휘고 힘이없어 다리미조차 잡기 힘들었다. 세탁소는 수양딸 이기주에게 맡겼고, 그는 말하였다.

“이제는 내려놓아야지, 내 아내가 홀로 잠든 지산동 고향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귀향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가면 내가 이렇게 좋은 하와이 커피를 못 마시지, 일 년만 더 마시고 내년에 가리라.”

그는 그렇게 말했으나 곧 병상에 쓰러졌다. 세 해 가까운 투병 끝에 고향으로의 길은 닿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인편과 은행을 통해 , 그동안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했었다. 당시 땅 수십 마지기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달러를 수령하거나 원화로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마을의 먼 친척뻘로, 일본유학과 공직에 있던 양 모 씨에게 그 일을 맡겼다. “똑똑한 사람이니 잘 처리해 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돈은 중간에서 가로채졌다.

장손 '동열'에게 전해달라던 부탁은 묻혔고, 송금 사실을 알리는 편지들마저 사라졌다. 뒤늦게 수양딸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는 이미 돌이킬 길이 없었다.

둘째 아들의 손자 '구열'이가 경북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환하게 웃었다. “내 손자가 의과대학에 들어갔다오. 오늘은 내가 한턱내겠소!”

그의 자랑 뒤에는 깊은 고독이 숨어 있었다.

가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조선을 위해 바친 그 시간… 조선은 우리를 기억이나 할까.”

곧 고개를 저었다. 기억받기 위해 산 것은 아니었다.


방 안에는 낡은 서류와 사진 몇 장이 남았다. 동지회 모임에서 찍은 단체사진, 젊은 날 빛나는 눈빛의 그의 얼굴이 돋보였다. 사진 아래에는 희미한 글귀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 모였다. 조국 광복의 불씨가 되리라.”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묻히는 땅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의 생은 이미 조국을 향한 길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세상은 잔혹했다. 수양딸은 그가 남긴 독립금 영수증과 국채 증서, 아들에게 전하려던 편지까지 모두 정리해 버렸다. 무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고향으로 전해진 건 사망일자뿐이었다.

고향은 멀어졌고, 동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과 헌신은 하와이의 바람 속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훗날, 그의 증손자가 낡은 사진 한 장을 들고 하와이 땅을 다시 밟았다. 기록관 서랍 속 누렇게 바랜 [태평양잡지]를 마주했을 때, 그는 알았다. 뿌리가 단순한 이민자의 발자취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아낸 한 세대의 역사였다.

바람에 흩날리던 이름 없는 헌신은 그렇게 후손의 발걸음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잊혔던 이름은 마침내 조국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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