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말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1947년 9월 3일, 양재준은 호놀룰루 동부외곽에 위치한 와이마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찾아온 병세가 몸을 서서히 잠식하였고, 그는 결국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고 병상에 눕게 되었다. 병원 침상에서만 2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1950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도 봄이 찾아왔다. 병실 창밖에는 붉은 꽃망울이 어김없이 피어났으나, 양재준의 시선은 더 이상 봄을 느끼지 못했다. 사탕수수밭의 격렬한 노동과 세탁소에서의 밤샘 일거리가 남긴 흔적은 그의 몸을 이미 깊은 침묵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말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손바닥이 갈라져 피가 나던 사탕수수밭의 세월, 다리미 손잡이를 붙든 채 새벽을 넘기던 세탁소 시절부터 그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해방의 기쁨이 전해진 그날조차 그는 고통으로 웃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젊은 이민 2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 때, 그는 창가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드디어…”
그 두 음절은 환희라기보다는, 너무 늦게 찾아온 소식을 향한 깊은 회한 같았다.
병은 은밀히 다가왔다. 처음엔 허리가 아팠다. 이어서 등과 다리가 저렸고, 마침내 가슴 깊숙한 곳이 시리듯 아려왔다. 그러나 그는 병을 병이라 생각지 못했다. “노동의 흔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늙어서 오는 당연한 고통”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동네 의사가 입을 열었을 때는 아무도 그 낯선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Progressive tuberculosis… 폐결핵 말기 증세입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통역을 거쳐 양딸의 가족이 설명을 들었을 때,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정작 양재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자에게 병은 곧 운명이었다. 병원은 사치였으며, 남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은 죄와 다름없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그의 병실은 적막하지 않았다. 세탁소를 사랑방 삼아 동지들을 모았었다.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아 조국에 보냈던 그였다. 병문안을 오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다. 동지회와 호상회, 그리고 교민단체의 인사들이 줄지어 병실을 찾았다. 병원 기록지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만성 통증, 호흡 곤란, 영양실조 의심.”
그러나 그의 곁에는 단순한 진단 기록 이상의 삶의 무게가 있었다. 남은 수양딸과 그 가족, 그리고 낡은 수첩이 그의 손을 지켰다. 수첩 속에는 빽빽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1911년 4월 10일, 십 전회 송금 기록
1923년 6월 15일, 독립금 헌금
1931년 3월 1일, 한미승전 후원금 100불
1944년 10월, 독립금 12달러 납부
1947년 1월 13일, 유학생 장학금 후원과 독립금 기부
십여 권의 수첩은, 그가 평생 흘린 땀과 조국을 향한 염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종이 위엔 조국이 있었으나, 병실 안의 그는 한없이 쓸쓸했다. 고향에 남은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가슴을 젖혔다.
1950년 4월 2일 밤. 그의 호흡은 이미 가늘어지고 말소리는 희미해졌다. 곁을 지키던 수양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그는 겨우 입술을 떼며 말했다.
“고향에… 나의 죽음을 알리고, 나중에 무덤은 교민회에서 알 수 있을 거라 전해라. 그리고… 재산을 정리하여 맡겨둔 돈과 예금을 찾아 아들 원효와 장손 동열에게 전해다오…”
마지막 힘을 다한 목소리는 곧 고통에 삼켜졌다. 눈동자는 무언가 더 전하려는 듯 떨렸으나, 누구도 그 뜻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말 없는 봄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이름 없는 죽음, 그러나 남은 기록은 남았다.
1950년 4월 2일 오후 12시 55분. 하와이 시간으로, 양재준의 심장은 멈췄다. 사망 기록에는 차갑게 적혔다.
“이름: 양재준 / 사망일: 1950.04.02 / 사인: 폐질환.”
묘비도 없었고, 유언장도 없었다. 장례를 준비할 가족도 거의 없었다. 남은 것은 병원 서류철 한 장과, 곁을 지키던 수양딸의 눈물뿐이었다.
그날 밤, 수양딸은 대구 지산동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은 오늘 돌아가셨습니다.”
짧은 한마디로 고향에 부음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세대를 넘어 이어졌다. 후손들은 매년 제사와 시제, 명절 차례 때마다 이름 없는 묘비를 대신하여 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역사 속에 남은 흔적
비록 그의 무덤은 남겼지만, 그의 삶의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다. 수백 건의 독립금 헌금과 공동 모금 활동이 황성일보와 하와이 현지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원본과 사본 일부는 독립기념관과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지금도 마이크로필름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는 그의 기록 일부로 중요한 대부분의 기록은 발견된 않았다.
양재준의 마지막 봄은 쓸쓸했지만, 그의 이름 없는 희생은 결국 기록과 기억 속에서 일부지만, 영원히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