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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대한인동지회, 조국을 잃지 않는 사람들

태평양 건너에서 나라를 구하다

by 영 Young

하와이 쿠쿠이(Kukui)의 세탁소 안, 끓는 물통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달구어진 다리미가 옷감을 누를 때마다 '치익'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러나 양재준의 삶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은 옷을 다렸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하와이동포들은 조국을 잊지 못했다. 새벽마다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돌려 읽고, 편지를 낭독했다. 몇 달러씩 모아 봉투를 채웠다. 그들은 스스로를 ‘동지(同志)’라 불렀다. 1909년 ‘한인합성협회’로 시작한 모임은 곧 ‘ 대한인동지회’로 이어졌다. 양재준은 와이메아 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며, 칼리히지역 동포들을 이끌었다.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세탁소 뒤편 작은 창고안이다.

등잔불 아랫사람들이 모여 《신대한》을 읽고, 이승만의 글을 함께 낭독했다. 목소리는 자주 떨렸고, 눈시울은 젖었다. 하지만 다짐은 더욱 굳어졌다.

“우리는 지금 하와이에 있으나, 마음은 늘 조국에 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양재준은 매달 회비를 걷고 독립자금을 송금하는 일을 맡았다. 봉투 속 몇 달러 옆에는 항상 동포들의 이름이 적혔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물었다. “정말 우리의 돈이 조선까지 닿는 걸까요?”

양재준은 고개를 들어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결과를 보며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며 사는 겁니다. 하와이에 있든 어디에 있든,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순간, 방 안은 숨죽인 듯 숙연해졌다. 말보다 먼저 행동하는 사람, 그것이 양재준이었다.

하와이 교민 사회에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강제합병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면, 양재준은 동포들을 모아 맞섰다. 농장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이 한인을 괴롭히거나 파업을 주도할 때도 그는 앞장서서 사람들을 규합했다. 미국 농장주들조차 “조선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와이 독립운동의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이승만은 학교와 협회를 세우며 외교 독립론을 폈다. 한인기독학원(1906), 대한합성협회(1907), 대한인동지회(1909), 대한인국민회(1910)를 세워,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에 외교 전을 펼쳤고, 교민 교육과 종교 활동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켰다.

박용만은 무력 독립론에 매달렸다. 1914년 국민군단을 조직해 300여 명의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소년병학교(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운영해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두 지도자의 노선이 충돌하면서 교민 사회는 종종 두 갈래로 갈라졌다.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가 오가는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 속에서도 양재준은 사람들을 모으고, 앞장서 싸웠다.


눈물의 사진 신부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무렵, 하와이 교민은 7,200여 명. 대부분 장가를 가지 못한 총각들이거나, 고향에 처자를 두고 온 홀아비들이었다. 1910년대와 20년대 초, 외로움에 지친 많은 이들이 ‘사진 신부’를 맞았다. 고국에서 중매쟁이가 보내온 사진 한 장으로 결혼을 약속했고, 200달러가 넘는 큰 비용을 부담했다.

그러나 호놀룰루 부두에 도착한 순간, 신부들이 마주한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여보시오, 처음 뵙겠소. 나요.”

사진 속의 젊은 총각을 기다렸다. 그러나, 눈앞에 선 신랑은 이미 세월과 노동에 찌든 40~50대 사내였다. 되돌아갈 배는 없었다. 신부들의 눈물은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약 600명의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에 들어왔다. 양반집 규수도 있었고, 신여성도, 종교인 출신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막일과 노동 속으로 내던져졌다. 어떤 이는 가난에 시달려 아내를 하루 품앗이로 빌려주는 비극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신부들은 독립자금 모금을 멈추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교민들의 민족의식이 고조되자, 그들도 교회와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양재준은 이미 고향에 아내와 자식이 있었기에 사진 신부를 맞지 않았다. 대신 세탁소, 동포들, 그리고 독립운동이 그의 삶의 동반자였다.

교민 사회의 큰형으로 버팀목이 되었다.

양재준의 세탁소는 미군들을 주요 고객으로 두어 형편이 다른 교민들보다 나았다. 그는 그 힘으로 어려운 이를 도왔다.

“노팔 형님, 이번 달 월세가 밀렸습니다…”

“염려 마시오. 같이 방법을 찾아봅시다.”

사람들은 그를 노팔 형(老八 兄)이라 불렀다. 의지할 큰형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교민 사회의 버팀목이었다.


1927년, 그는 양녀와 그 아들로 추정되는 가족과 함께 사진 두 장을 남겼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서양 신사였다. 사진 옆에는 정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老八 楊在俊 氏 1927.6”

그의 이름은 세탁소 간판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교민들의 기억 속에, 사진 속에, 그리고 독립운동의 기록 속에 깊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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