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 없는 이름을 다시 부르며
이름이 없었다. 묘비도 없었고, 남은 편지도 없었다. 오직 빛바랜 사진 한 장만이 그의 존재를 말해줄 뿐이었다. 그 사진 속 인물은 바로 양재준, 그는 1904년 11월,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목적지는 머나먼 태평양 너머의 사탕 수수밭이었다. 조국은 이미 전쟁과 식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는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찾고자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단순히 삶만을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피 흘려 일하며 번 돈을 고국의 독립을 위한 기금으로 보냈다. 말없이 조용히, 그렇게 그는 조국을 마음에 품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하와이의 뜨거운 햇볕 아래, 사탕수수밭은 인간의 육신을 갉아먹는 고역의 현장이었다. 노동은 길고 고되었다. 보수는 적고 차별은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재준은 기죽지 않았다. 땀 흘려 번 돈을 떼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의 삶은 곧 조국을 위한 가장 치열한 항거였다.
1950년 4월 2일, 그는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호놀룰루의 공동묘지 한켠에 동지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었다. 돌 하나 세워지지 않았고, 묘비명조차 남지 않았다. 오직 바람만이 그의 무덤 위를 스쳐갔다. 시간은 그렇게 그를 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한 세대, 두 세대가 흘러도 그의 피는 이어져 있었다. 세월의 먼지 속에서 증손자, 장손이 일어섰다. 그는 증조부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홀로 길을 나섰다. 수십 년 묻혀 있던 문서를 뒤지고, 낡은 사진을 확인했다. 사라져 버린 흔적들을 붙잡으며 그는 증조부의 생애를 조각조각 이어 붙였다. 단 한 줄이라도, 단 하나의 기록이라도 “있었다”는 증명을 위해 그는 집요하게 걸었다.
그 걸음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이름 없는 무덤에 묻힌 양재준의 이름이, 국가의 기록과 역사 속에 다시 세워졌다. 누군가는 여전히 사소한 기록의 불일치를 이유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삶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기억은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묘비는 여전히 세워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책 속에서, 후손의 입에서,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감사탑 위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무명이 아니었다. 그는 조국이 인정한 독립운동가였고, 후손이 자랑으로 삼을 조상이었으며,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곧 한 사람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하나의 가족을 다시 잇는 일이었고, 한 시대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었다. 지워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양창병이 증조부의 이름을 불러낸 것은 단순한 가족의 기록을 넘어, 민족의 망각을 거슬러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이제 양재준의 이름은 가장 단단한 묘비 위에 새겨졌다. 그것은 대리석도, 화강암도 아니다. 바로 기억이라는 이름의 돌 위에서 그는 다시 태어났다.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또 다른 양재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어딘가에 묻혀,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이들. 나라를 위해 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이다. 이 책은 그들에게 바치는 작은 비문이다. 한 줄의 기도이며, 망각을 거슬러 기억하기 위한 기록이다.
이름 없는 무덤 위에, 우리는 이제 이름을 새긴다. 살아 있는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무명은 이름이 되고, 잊힌 역사는 살아난다.
묘비 없는 이름은 이제 영원히 불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림 속에서, 그는 다시 우리 곁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