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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대한민국 정부의 감사탑 건립

묘비 없는 무덤에서 되살아난 이름

by 영 Young


75여 년 만에 잊힌 기억이 다시 불려 나왔다.

하와이 호놀룰루 시내 중심가 동쪽, 자동차로 10여 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누우 아누 메모리얼 파크(Nuuanu Memorial Park)가 있다. 축구장 두 개 반에 해당하는 1만 7천㎡ 규모의 공동묘지 한편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한국인들이 잠들어 있다. 그 속에는 양재준을 비롯해 900여 명에 달하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그들을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100여 년 가까이 비바람 속에서, 무덤은 잡초에 묻히고 이름은 역사의 한 구석에 갇혀 있었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나마 하와이 한인 독립운동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관련 사료를 조사해 왔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후손이 없거나, 동인(同人) 임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 서훈 심사에서 번번이 좌절되었다. 사망일자와 제적 기록의 불일치, 출생연월일의 모호함, 그리고 영어로 변형된 이름의 표기 차이까지, 모두가 서훈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희생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조국을 등진 것이 아니라, 조국을 살리기 위해 땀 흘렸던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결국 개별 공훈을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이곳에 묻힌 이들이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끌어온 인물들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9월, 이들의 헌신을 기리는 높이 3여 미터의 감사탑이 세워졌다. 보훈부와 국방부가 주관하여 세운 이 탑은 다름 아닌 양재준의 묘지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세워진 이 탑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정부가 올린 뒤늦은 감사의 표식이었다. 그날,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셨기를.”


증손자의 여정은 여기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는 수년간 증조부의 삶을 추적하며, 사탕수수밭에서 흘린 땀과 독립자금으로 바친 피 같은 희망을 기록으로 되살려냈다. 수차례 정부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올렸지만, 사소한 기록의 불일치 때문에 번번이 반려되었다. 부고장과 제적등본의 사망일자가 다르고, 본적지 출생연월일이 불확실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농촌 현실에서는 출생신고가 수년씩 늦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사망일자와 신고일자가 일치하지 않는 것도 흔한 관행이었다. 미국 검역관이 귀에 들리는 대로 이름을 기록해 철자가 제각각인 사례도 많았다.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양재준이 1904년 11월 18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사실은 명확하다. 인천 이민사 박물관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묘지 매장 등록 서류와 부고장, 그리고 수양딸 가족과 함께 묘 앞에서 찍은 사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사진 한 장에 적힌 “노팔 양재준”이라는 글씨는, 그가 이곳에서 살아 숨 쉬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때로는 연도와 연령이 호적과 맞지 않기도 했다. 음력과 양력의 차이, 행정 기록의 오류가 얽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가지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땀 흘리며 번 돈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고, 조국의 해방을 향한 원대한 뜻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증손자의 사명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여전히 후손을 찾고, 활동 증빙 자료를 발굴하며, 역사의 빈칸을 메워가고 있다. 무엇보다 절실한 일은, 묘비조차 없는 증조부의 무덤 앞에 제대로 된 묘비를 세우는 것이다. 묘비 없는 무덤을 넘어, 이제는 이름 있는 무덤으로 되살려야 한다.

한 세기 전, 양재준은 이름을 버린 채 조국을 품었고, 지금 증손자는 흩어진 이름을 찾아 역사의 자리에 돌려놓고 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묘비 없는 무덤에서 시작된 이름이 다시 태어났다.

조국을 향한 충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역사는 끝내 그를 불러냈다.”


후손의 헌사

“증조부님, 이제 더 이상 무명으로 남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피와 땀, 그리고 조국을 향한 충정은 후손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드리며, 우리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묘비는 늦게 세워졌으나, 기억은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고향 지산동, 우리 중화 양 씨 가문의 이름으로 살아 계십니다.

이제 모든 시름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노팔 양재준 선생 좌측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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