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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병원기록, 이민국 명부, 낡은 신문

흩어진 단서를 붙잡고 이름을 찾다

by 영 Young

2019년 11월 증손주는 호놀룰루에 도착하자마자 한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와이마 메디컬 센터(Waima’s Medical Center) 70여 년 전, 양재준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바로 그 병원이었다.

병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시의 병동은 이미 철거되었고, 기록은 디지털화되며 외부인 접근은 까다로워졌다.

그는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1950년 4월 2일, 양재준이랃는 분이 이 병원에서 사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잠시 뒤, 담당 직원이 나왔다.

“오래된 기록이지만… 시민정보보관소와 협조하면 사망자 명부 정도는 확인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있었다.‘사망자 명부’ 속 한 줄

며칠 뒤, 호놀룰루시 보건국 보관실에서 증손자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로필름 리더를 넘겼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단 하나의 줄이었다.

Yang, Chai Choon, Male. Korean. Approx. 76 years old. Death: April 2, 1950. Place of Death: Waima’s Hospital.

그는 숨을 멈춘 채 화면을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 그 이름만 있었다. 찾고자 하는 묘역은 없었다. 모든 증거가 사라졌다고 믿었던 그 이름이 공식 기록의 한 줄로,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입국자 명단 발견 1904년, 11월 18일 코리아호

이름을 따라 더 먼 과거로 발길이 향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의 이민기록관, 양창병은 검색대를 통해 선박명 ‘S.S. Korea호’와 1904년 11월 18일 하와이 도착자 명단을 찾아냈다.

“Yang chai Choon, 33, married, Chi Eun(San, 표기오류) Dong, Korea, Arrived Nov. 18, 1904”

철자법은 달랐지만, 그는 그것이 증조부임을 직감했다. ‘Yang’ 혹은 ‘Young’으로, 출생지는 지산동을 지은동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음 자는 대로 표기했기 때문에 흔한 일이었다.

그의 태서난 동내이름은 철자표기가 잘못 쓰였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이름은 증손자의 손끝에 의해 다시 한 글자씩 복원되고 있었다.

잊힌 기사 속에서 빛나던 흔적

호놀룰루 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증손자는 대한인국민회, 동지회 관련 기사들을 뒤졌다. 그리고 1925년 3.1절 기념식 기사에서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Yang Jae Chun of Kaimuki Laundry Association delivered a message on the sacrifices of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카이무키 세탁연합회 대표 양재준” , 하와이 한인 공동체에서 활동한 독립지지자.

이 짧은 문장은 단지 소개가 아니었다. 잊힌 이의 삶을 다시 ‘인정’하는 공적 기록이었다.

조각을 붙여, 하나의 이름으로

이제 그는 퍼즐을 맞추듯 자료를 정리해 나갔다.

1904년 11월 18일 입국자 명부.

1925년 신문 기사 속 연설자.

1950년 4월 2일 병원 사망자 기록.

‘양재준’과 ‘양재춘’의 음운 일치.

출생지 ‘지산동을 지은동’으로 잘못등재

증손자 본인의 호적등본 가계 확인.

그 모든 단서를 붙잡고, 그는 한 문장을 완성했다.

“1904년 이민 1세대 양재준은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노동자이자 세탁소 운영, 그리고 조국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의 동지였다.”

이제 이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고, 기억될 준비가 된 존재였다.

이름 짓기, 그 위대한 복원의 시작

그날 밤, 증손자는 숙소에서 짧은 글을 남겼다.

“이름은 다시 태어났다. 수십 년의 침묵을 뚫고, 기록 위로 피어난 생애의 증거다. 증손자의 걸음이, 드디어 그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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