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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증손자의 탐방

제17장. 호놀룰루에서 묘지를 찾다.

by 영 Young

비석은 없었지만 신문기사가 길을 열었다.

2024년 11월 말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 비행기에서 내린 한 한국 중년신사는 온몸이 묘한 떨림을 느꼈다.

손에는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과 호적초본, 족보사본이 쥐어져 있었다. 빚 바랜 사진 속 한 사람은 양복. 넥타이에 중절모를 쓴 중년신사, 그가 바로 증조부 양재준이었다

증손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증조부의 묘지를 찾아 5여 년에 걸쳐 매년 하와이를 방문했었다.

하와이 주재국 보건국. 병원, 이민국, 국립도서관, 정부 기록물 보관소, 교민회, 한국영사관,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주요 공동묘지를 찾아 나섰다. 수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상심에 빠져, 포기상태에 이르렀다. 그때도 하와이를 방문하여 증조부의 족적을 추적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귀국했었다. 고국에 귀국한 지 1주일이 지나, 하와이대학 한국 한 연구소 소장 (Mr. Michael E. Eacmillan)으로부터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단서를 보내왔었다. 도서관 마이크로필름에서 증조부로 추정되는 사망기사를 찾았다고 보내왔다.

떨리고 흥분되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고장에 표시된 여러 공동묘지 관리국에 메일과 전화로 수소문했었다. 최종 한 군대에서 증조부의 묘지를 확인했었다. 다음날 바로 호놀룰루로 다시 날아갔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증조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호놀룰루행 비행기 안에서 1982년, 2019년부터 시작된 긴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호놀룰루 시립 공동묘지(Municipal Cemetery), 그곳은 이름 없이 죽은 이들, 찾는 이 없는 죽음이 모여든 마지막 장소였다. 태평양의 햇살이 비추는 들판 한가운데, 양재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빈민구역(paupers' section)’이라 불리던 이 묘역은 하와이에서 죽은 이민노동자, 홈리스, 정신병원 사망자 등이 묻히는 곳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국의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출생지조차 불명확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분명 조국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현지에 가장 오래 거주한 최창환목사를 만나 이민역사를 들었다. 이민 1세대의

묘지는 여러 섬에 흩어져 있으며, 홍수로 무너져 폐허가 된 곳도 많았다. 오아후의 1세대 한인들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를 알려주었다. 아내와 같이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북쪽 외곽지역부터 찾아갔었다. 오랜 세월에 깨지고 깎긴 비석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무려 10여 곳의 추모공원(Diamond Head Cementry, O'ahu Cementry , Nuuanu

Memorial Park, Puuki Cementry, Hawaiian Memrial Park, Lili'uoklani protestant Church 등)을 찾아다니며 지칠 대로 지쳤다. 깊은 절망감에 빠졌었다.

기록으로 남은 유언도, 그의 죽음을 지켜본 수양딸가족, 동지들도, 대인국민회도, 동지회도, 이제는 세월 속에 사라지고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많은 이들이 묻힌 묘역 위로는 망각만이 자랐다. 야자수 잎이 흔들리고, 붉은 흙 위로 풀이 높이 자랐으나 그의 이름은 찾지 못했다.


증손자는 보내온 양재준의 사망기사에 공지된 공동묘지로 공항에서 바로

달려갔었다.

아늑한 자리에 따뜻한 햇볕을 같이한 묘지 앞에 증손자는 감격의 눈물을 솟았다. 조선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밭을 헤매다 이름 없이 묻힌 한 남자의 증손자는 흙을 조심스레 만지며 말했다.

“여기에 계시는 거죠, 증조할아버지… 묘비도 없고, 사진도 없지만… 그래도 이제, 할아버지는 잊히지 않을 겁니다. 이 증손자가 외롭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날, 2024.12.1., 그는 작고 둥근돌 하나를 가져와 그 자리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이름 없는 묘에 바치는 후손의 첫 번째 묘비였다. 고향에서 준비해 간 청주, 각종 제물, 과일 제물, 커피를 올려 제를 지냈다. 73년 만에 증손자와의 회후였다. 그토록 좋아하셨다는 커피를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아메리카노 코나커피를 매일 올렸다.

왜 그들은 묻히고도 사라졌는가

수많은 조선인 이민자들이 비슷한 길을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세탁소에서, 식당에서 조국을 꿈꾸며 살았지만 죽어서는 외국인, “Unnamed”가 되었다.

그는 하와이 입국자 명단에는 있으나, 그들의 삶은 국가가 잊어버렸다. 그들의 죽음은 공동묘지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묘비 없는 이들의 이름은 망각 속에서 천천히 사라져 갔고, 그들을 기억하는 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묻는다. “왜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 없었는가?” 그리고 누군가는 대답한다. “우리가 이제라도, 그들의 이름을 다시 새겨야 한다.”

묘비 없는 땅 위에, 새로 쓰이는 기록

증손자는 묘역을 떠나기 전, 종이에 한 줄을 적어 놓았다.

“여기, 양재준이 잠들어 있다. 조선을 위해 살았고, 하와이에서 잊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다시 불릴 것이다.”

그 자리엔 단단한 약속이 남았다.

[확인 사항]

양재준은 동지회 주관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동지회 호상회에 정기적인 회비를 납부했었다.

비석도 동지회에서맞춤형으로 지원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매장기록은 남아있으나 비석의

행방을 알수없다.

당시 수양딸 또는 그가족에게 해답이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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