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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Sep 07. 2023

한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됐다


#1

"넌, 상상력이 뛰어나. 공감도 잘하고"


1998년 가을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나를 그렇게 소개했다. '상상력이 뛰어난' 그리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그전까지 다른 선생님들께 별다른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던지라 그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특출한 재능도 그렇다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실은 담임 선생님과 나는 반년이 넘도록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 제안도 선생님이 먼저 해주셨다. 특유의 밝은 미소 덕분이었는지 가끔 엄마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을 두서없이 떠들곤 했는데 그 얘기를 한참 듣던 선생님이 "서로 편지 쓰면서 더 자주 소통해 보자"라고 말씀해 주셨고 흔쾌히 수락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일주일에 적어도 1~2편(?)의 글을 썼다. 몇 주간은 내 이야기만 쓰다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쓸거리가 없어지자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일찍 학교에 도착하는 아이의 속사정이 궁금하기도 했고 창가 구석에서 마른침을 닦으며 잠들기 일쑤였던 친구의 사연을 묻기도 했다. 축구 골키퍼 유망주로 활약하다 발목 부상으로 늘 어두운 표정을 짓던 친구에게도 말 걸었다. 그들의 이야기와 내 생각을 보태 편지에 썼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세상에 한 사람의 목소리의 힘은 세다"라고. 그 말을 듣는 데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안 까먹으려고 공책에 써뒀다. 덕분에 2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문장이 됐다.




#2


이번달 팀라이트 매거진 주제가 'MBTI'라 혹시나 몇 개월 만에 내 성격이 바뀌었나 싶어 14분의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재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올바른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라는 다소 거창한 문구가 눈에 띄는 ENFJ-T.


대부분 칭찬으로 일색 된 분석글이 나와서 그중에도 내게 닿는 내용들만 일부 추려봤다.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면 목소리를 낸다. 다른 이에게 자기 생각을 강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올바른 일을 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구체적으로 외향형은 54%가 나왔다. 지난번 검사 때보다 3% 정도 감소했다. 그 말은 내향형도 길러지고 있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 가는 것이 익숙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좀, 귀찮다. 혼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다음은 직관형인데 64% 수치를 보였다. '매우'를 붙여 상상력이 뛰어나고 개방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검사에선 설명한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것도 숨은 의미와 막연한 가능성에 집중한다는 것도 수긍했다.


이어 감정형 68%, 계획형은 54%가 각각 나왔다.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살피는 일을 중시한다는 것과 계획적인 성향 등이 눈에 띄었다.


크게 달라진 수치는 민감형인데 54%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스트레스에 민감하다고 분석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좀 그렇게 변한 것 같다.



#3


지난 4일 서이초 교사 49재를 앞두고 취재를 이어가면서 25년 선생님이 떠올랐다. 취재력을 발휘해 선생님의 행방을 3시간 만에 찾았다. 작년까지 전교생이 100명도 안 되는 시골학교의 교장에서 시내 쪽 학교로  이동하신 것으로 확인됐다.


교무실 등에 문의해 선생님 연락처를 받았다. 떨렸다. 두근 되는 마음을 안고 전활 걸었다. 쭈뼛거리며 소개를 하자 수화기 너머로 함성과 함께 반가움의 웃음소리가 가득 들렸다. 늦었지만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자존감이 낮던 아이가 선생님 격려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주고받던 편지들처럼 지금은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글을 쓰면서 먹고 산다고.


쭉 얘기를 듣던 선생님은 단호히 말씀하셨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익숙한 격려였다. "거봐, 선생님 말이 맞았지? 넌 그런 아이였어."



지난달 아들과 보성 율포해수욕장을 찾았다. 아이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게 말했다. "아빠, 바다를 자세히 봐. 고래가 보일거야."




글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구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MBTI'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MBTI 결과물을 보고 내 아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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