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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Oct 15. 2023

그룹 '잔나비'와의 첫 만남과 그 결실

내 소개


나는 세 가지 직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년(長年)의 한 남성이다. 먼저 대학교수로서 인지언어학과 인지과학을 포괄하는 인문학 분야에서 연구 중이다. 인간의 언어를 우리 몸에 비추어 살펴보는 이론에 몸담고 있다. 인지 과정으로서의 은유와 환유, 그리고 여러 개념을 혼성하여 새로운 개념을 창작하는 개념적 혼성 이론에 특히 관심이 많다. 다음으로 나는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인문학 내에서의 통섭(統攝, consilience)을 구축하고 있는 해외 저서들을 발굴하고 번역하여, 인지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지식을 대중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브런치스토리(Brunchstory)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된 것은 순수하게 글쓰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캐나다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동양철학 교수 에드워드 슬링거랜드(Edward Slingerland)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해 《취함의 미학》(Drunk)으로 출간했었는데, 이 책을 홍보하고 슬링거랜드 교수의 인지과학 사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글을 적어 브런치스토리 플랫폼에 올린 것이 브런치스토리 작가의 첫걸음이었다.


나에게는 시를 쓰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공연 사업을 하면서도 거의 매일 시를 쓴다. 게다가 잘 쓴다. 하지만 친구의 시에는 비유가 너무 많아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비유를 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그 시의 매력이니 말이다. 그래서 난 친구에게 시 한 편 쓰고 나면 바로 옆에 그 시를 쉬운 말로 풀어주는 에세이도 같이 적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운문과 산문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특히 압축된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친구에게는 그런 에세이가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면서 그 에세이를 내가 맡겠다고 친구에게 제안했다. 친구는 너무 좋아했고, 우리는 완성된 글을 놓고 토론을 이어나갔다. 친구의 시에 나의 에세이가 더해진 글을 30편 정도 완성해 《시와 에세이의 연리지 멜로디》라는 제목의 브런치북으로 출간했다. 


잔나비와의 첫만남


브런치스토리 작가로 활동하던 어느 날 대학 때 후배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런 내용이었다. 예전에 우울증에 깊이 걸려서 가장 좋아하던 기형도를 비롯한 모든 시집과 써둔 습작을 다 버렸고, 지금은 아주 많이 후회된다고 했다. 예전에 본인이 썼던 글을 혹시라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내가 자료 정리를 워낙 잘하는 편이니 자기 글을 어떤 식으로든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사실 나도 그 후배의 습작을 보관하고 있지 못했다. 나는 마침 지난주에 기형도의 〈늙은 사람〉이라는 시 분석을 브런치스토리에 올렸었는데, 그 기형도 시집을 버릴 정도로 힘들었구나라는 말로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나 또한 이사하면서 많은 책을 정리하다 보니 지금은 그 습작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다시 시를 쓰고 그 시를 브런치스토리에 올려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본인도 브런치스토리에 가입은 해뒀는데, 작가 인증받기를 해야 해서 미뤄둔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후배는 브런치스토리에서 내 글을 읽고는 ‘라이킷’을 눌러주었다. 후배는 내가 앞으로 계속 작가 활동을 할 것이니 이어령의 《디지로그》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했다. 그리고는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글도 정말 좋으니 꼭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잔나비가 누구이며, 그가 쓴 그 글이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 네이버 검색을 해보았다. 후배가 말한 ‘잔나비’는 알고 보니 1992년생 잔나비띠(원숭이띠) 최정훈(보컬)과 김도형(기타)으로 구성된 2인조 밴드였다. 그리고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는 이 밴드가 2019년에 발매한 2집 《전설》에 수록된 여덟 번째 곡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였다. 작사가는 잔나비의 보컬을 맡은 최정훈이었다. 이 곡을 처음에는 멜로디 위주로 들었다.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사를 보면서 다시 들었다. 가사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다시 들으니 더욱 눈물이 났다. 사랑에 대해 바보 같았던 내 모습이 그 뮤직비디오에서 읽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년의 한 남성인 나는 그룹 ‘잔나비’를 알게 되면서 잔나비의 음악을 듣고, 잔나비의 곡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졸업 시점부터 음악을 들었다. 그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록에 국한되었다. 영국의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처음 들으면서 이 장르에 빠졌고, 영국을 넘어 이탈리아의 뉴 트롤즈(New Trolls), 뮤제오 로젠바흐(Museo Rosenbach), 꿸라 베끼아 로깐다(Quella Vecchia Locanda), 그리고 프랑스의 상드로제(Sandrose) 등의 앨범을 구해 듣곤 했다. 김광석의 LP판과 CD도 내가 수집한 앨범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2014년에 데뷔한 잔나비를 2023년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잔나비’를 아냐고 물어보니 다들 알고 있었고, 아는 수준을 넘어서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다. 나의 테니스 파트너인 우리 학교 행정부장님의 전화벨 소리도 알고 보니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였다. 결국 남들 다 아는 잔나비를 나 혼자 몰랐고 최근에서야 알고는 그 음악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잔나비의 정신세계에 대한 호기심 발동


이런 내가 이제는 잔나비의 정신세계가 궁금해 잔나비의 곡을 듣고 읽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의 형식은 앞에서 언급한 시인 친구의 시를 읽고 분석하고 느낀 점을 적는 형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글을 쓰기 위해 곡을 듣고 가사를 읽었다. 한 단어도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히 듣고 읽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잔나비에 완전히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글이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려 여러 작가들과 공유했다. ‘려원’ 작가님은 안부를 물으면서 내가 올린 글 하나에 “잔나비가 자꾸 날아다녀서 잔나비와 사랑에 빠져 계신 줄 알았죠^^”라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또 다른 글에는 “잔나비의 노래에 빠지실 만합니다. 시각과 청각과 인간의 감각까지 뽑아내시는 감각이 놀랍습니다. 흥미로운 구상인데요^^”라는 답글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잔나비를 소개해 준 후배도 내 글을 읽고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평가해 주고 교정에도 많은 시간을 보태주었다. 려원 작가님의 댓글에 많은 힘을 얻었고, 후배의 교정으로 글이 많이 다듬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 두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책은 처음에 잔나비의 가사를 분석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신비롭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해서 그 느낌을 적어보려고 했던 것이 나의 처음 의도였다. 그런데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있는 인문학자로서 그 이론에 따라 분석하려는 습성이 나도 모르게 나왔던 모양이다. 잔나비를 소개해 준 후배의 말을 빌리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스치기만 해도 분석’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분석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분석을 ‘스치는 듯한 분석’이라고 부르고 싶다. 무겁지 않고 편하게 스치듯 지나가는 분석이라는 뜻이다. 나의 이론은 인지과학, 특히 ‘신체화된 마음’에 심취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잔나비의 글이 이 신체화된 마음 이론에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잔나비의 글에는 인간의 감각이나 정서 등의 개념이 온통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신체화된 마음을 이론적으로 연구했고, 잔나비는 이 이론을 예술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론 지향자인 한 인문학자가 예술 지향자인 가수 잔나비를 우연히 만나 한 권의 책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잔나비의 신비롭고 예술적인 곡들처럼 우리의 만남의 결실도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이 책이 잔나비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잔나비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잔나비가 사랑이나 이별, 계절, 슬픔, 죽음 등을 개념화하는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窓口)가 되길 소망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hearthigh/2224611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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