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아이들
앨범: 전설
발매: 2019.03.13.
작곡: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Q5PkxVkHAc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방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 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간대두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한 아이가 작은 방의 창문 앞에 놓인 조그만 책상에 혼자 앉아있다. 아이는 자기의 작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그 방에 ‘연연’한다. 그는 창문을 통해서만 ‘해가 뜨고 다시 지는’ 밤과 낮을 확인한다.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몸의 움직임은 없다. 몸의 움직임 없이 세상의 움직임을 보는데, 그 창구가 창문이다. 우리가 흔히 지적 활동이 부족한 사람을 보고 머리가 텅 비었다고 말하듯이 움직임이 부족한 이 아이의 몸 역시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고, 마음은 몸을 따르므로 결국 이 아이의 마음도 텅 빈 채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와 노래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생각하면서 노래도 부르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꼭 다문 입술이지만 숨은 쉬어야 하니 가끔씩 입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열린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그 한숨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밖에 있던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린다. 멀리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한마디 묻는다, 자기에게 불만 있냐고. 물론 아이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다. 이 세상에, 특히 기성세대에게 말이다. 그러나 아이는 불만이 있어도 그 불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하지 못한다.
아이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동시에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생리적·육체적으로는 어른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뇌는 아직 어른으로 성장 중이다. 겉으로 보이는 육체의 모습과 눈에 보이지 않는 뇌의 모습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니 아이들은 무거운 짐을 지는 느낌이 든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워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 같다.
과학자들은 흔히 인간의 뇌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이를 각각 좌뇌와 우뇌라고 부르고, 그 부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채 20세가 안 된 아이들에 대해서는 뇌의 좌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뒤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후두엽을 거쳐 두정엽, 측두엽, 그리고 전두엽으로 이어지는 뇌 구조가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뇌 구조이다. 후두엽은 태어나서 2년 정도 후에 완성되고, 두정엽과 측두엽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 6년이 걸리며, 전두엽, 특히 전두엽의 앞부분을 덮고 있고 눈과 이마 바로 뒤에 있는 뇌 부위인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은 약 20년이 걸린다. 많게는 22년이 걸리기도 한다.
전전두피질은 집중력, 조직, 판단, 추론, 의사결정, 창의성, 감정 조절, 사회적 관계 능력, 추상적 사고와 같은 실행 기능에 필수적으로 관여하는 뇌 부위이다. 이 부위는 사고를 평가하고 행동 계획을 실행함으로써 인지 기능에도 관여한다. 문제는 대체로 스무 살 이전의 아이들은 이 전전두피질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즉, 이 아이들은 성인에게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이성의 힘이 없다. 뭔가를 참아내고 인내하고 자기 능력 밖의 것이면 포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의 힘에 속한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이성의 능력이 없는 반면 감정이 강하게 지배한다. 아이들은 감정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춘기 증상을 일컬어 ‘중2병’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은 병이 아니다. 이는 아이들이 전전두피질이 완성되기 전까지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어른들은 이 과정을 조심스럽게 지켜봐 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체로 조바심을 낸다. 빨리 아이들이 철들고 인내할 줄 알며 책임감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어른들의 이런 반응은 결국 아이들이 자기 방에 연연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과정을 지켜봐 주지 못하는 어른들은 본인들이 이성의 힘으로 얻은 이른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격언들을 쏟아 낸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이 말을 듣는 아이들은 정말 야망을 품을까? 전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야망을 위해 시도하려던 의지마저 내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뼈와 살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들은 이미 아이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하여 지금의 지식을 얻었다. 그 지식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주면 아이가 쉽게 뭔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잔소리를 쏟아 낸다. 이런 잔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낸다. 꿈도 꿔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이성의 힘도 길러야 한다. 하지만 계속 벽에 부딪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직 전전두피질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런 일이 버겁게 느껴질 뿐이다. 어른들의 잔소리는 정말 ‘무책임’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아이들을 억지로 몰아넣는 것은 전전두피질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령 아이들이 어른들이 옳은 길이라고 하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본다고 하자. 어른들이 말하는 야망과 꿈에 도전해 본다. 그래서 이 세상의 ‘바다를 호령해’ 보려 마음먹는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삶은 현실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 현실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며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며 보이지도 않는 허공의 꿈을 성취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심술이 두드러기처럼 돋는다’. 그러면서 ‘꿈’이라는 어른들의 말만 들어도 입에서 욕이 나오고, 꿈은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만다’.
뇌는 아직 어른이 아닌데 외모는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에게 ‘하루하루는 참 무거운 짐’이다.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버팀이 필요하다. 그 버팀의 힘은 이성의 힘이고, 이성의 힘은 태어난 지 20년이 지나야 생기는 전전두피질에 자리잡고 있다. 아이는 아직 불완전한 전전두피질로 인해 이성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하루하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더는 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그런데도 현실은 눈을 부릅뜨고 아이의 눈앞에 무섭게 서 있다. 그러니 ‘하루하루는 참 무서운 밤’인 것이다. 버티고자 하지만 이 버팀은 쉽지 않다. 눈앞의 현실과 하루하루가 아이를 압도해 오니 말이다.
이런 무서움과 압도감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듯도 하다.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시간이 지나 스무 살이 되면 버티는 힘인 이성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하루를 자고 나면 하루만큼 어른이 되고, 또 하루를 자고 나면 또 하루만큼 어른이 된다.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라는 현실을 보내는 것이 아이들의 삶이다. 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아이들만 할 일이 아니라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거대 담론에 갇혀 있어 움직임을 가져갈 수 없다. 그나마 움직임을 가져가는 체육 시간도 거의 없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닌 이 사회의 잘못이다. 움직임을 아이에게 주지 못하고, 활력을 주지 못하는 이 어른의 사회 탓이다.
무엇을 위해 이 사회는 아이에게 움직임과 활력을 박탈하는 것일까? 굳이 이유를 들자면 지식을 쌓도록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에게 젓가락 사용 방법을 말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젓가락을 잡고 그 방법을 스스로 알아내도록 해야 그 사용법이 근육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몸의 움직임 없이 얻은 지식은 실행해 옮기기에 참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잔나비의 이 곡은 움직임을 빼앗겨 무기력하고 외로운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루하루 무서운 밤을 버텨 가며 서로에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지만, 무덤덤한 어른의 눈을 닮아야 할거라고 체념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나이만이 성숙의 척도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동감한다. 우리 곁에는 ‘어른 아이’도 있고 ‘아이 어른’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어른들은 가끔 어른 아이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그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가끔은 동화책도 보면서 이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빛을 닮아야 할 차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