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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Sep 24. 2023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책과 사랑과 영원함

앨범: 전설

발매: 2019.03.13.

작곡: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pQ222I1ULc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나의 자라나는 마음을

못 본채 꺾어 버릴 수는 없네

미련 남길 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서둘러 안겨본 그 품은 따스할 테니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언젠가 또 그날이 온대도

우린 서둘러 뒤돌지 말아요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아요


피고 지는 마음을 알아요 다시 돌아온 계절도

난 한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질래 또 한 번 영원히

그럼에도 내 사랑은 또 같은 꿈을 꾸고

그럼에도 꾸던 꿈을 난 또 미루진 않을 거야

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the-lovers-oil-painting-lightning-7754096/


책과 사랑과 영원함


내 마음은 책이다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추구하는 합리주의 철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실체로 본다. 몸은 만져서 알 수 있는 유형의 대상이고,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가 없으며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무형이다. 사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마음도 잘 알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가사를 쓴 잔나비의 최정훈은 스스로를 ‘읽기 쉬운 마음’이라고 한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 자신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자기 정체성을 편안하게 드러낸다. 그냥 ‘스윽 흝고’만 가도 누구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읽는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읽기의 대상은 ‘책’이다. 최정훈은 자기의 마음을 책에 비유한다. “내 마음은 책이다”라는 은유(隱喩, metaphor)가 글쓴이의 사고에 자리하고 있다. 책은 시, 소설, 수필, 학술 도서 등 장르가 다양하다. 내용이 읽기 쉽고 흥미진진해서 손과 눈을 떼지 못하는 책도 있지만, 너무 어렵고 난해해서 몇 쪽도 읽기 전에 우리에게 외면당하고 내팽개쳐지는 책도 있다. 쉬운 책은 읽는 사람에게 오래 ‘머문다’. 외로운 사람이 있다면 읽기 쉬운 자기에게 오라고 한다. 그러다 잠시라도 머물다 가라고 권한다. 외로운 사람은 잠시 머물기 위해 왔지만 결국은 쉽고 편안한 그에게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마치 쉬운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한 사람이 오래오래 그 책을 읽게 되듯이 말이다.


말하는 이는 자신이 외로운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대나무숲 같은 존재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외롭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 자기에게 와 주길 바란다. 자신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와 주길 바란다. 시원한 대나무숲 가운데 작은 책상이 하나 마련되어 있고, 그 책상 위에는 읽기 쉬운 책이 한 권 놓여 있다. 시원한 대나무숲과 책상 위의 읽기 쉬운 책은 그 자신이다. 이곳에 와서 쉬운 자기를 만나라고 권한다. 


누군가 자기에게 오래 머물다 가면서 ‘긴 여운’을 남겨 달라 부탁한다. 사랑을 해 달라고 한다. 그는 그녀를 위해 새하얀 빛으로 비춰주겠다고 한다. 이 사람에게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여운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그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람의 사랑은 동반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길을 갈 때 그녀와 같이 서지 않고 몇 걸음 뒤에서 그녀의 앞날이 밝도록 그 길을 비춰주겠다고 한다. 영원히 함께하지도 않을, 같은 길을 나란히 가지도 않는 사랑을 이 사람은 추구하고 있다. 왜일까? 사랑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사랑은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주저’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쪽짜리 사랑이라도 하고 싶어 한다. 떠나는 연인이 남긴 여운을 느끼면서 그녀의 앞날을 빌어주고자 한다. 


이 사람에게 사랑은 소박하고 소극적이고 짧은 사랑이다.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그는 이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는 잠시 함께 한 사랑을 밤이 찾아오면 기록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와 모습과 피부의 촉감 등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수집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책에 ‘새긴다’. 책에 기록된 감각의 덩어리는 둘만의 것이 된다. 


원래 감각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똑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 맛과 냄새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사적이고 내밀한 감각은 둘만의 감각이 되었다. 이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기록한 글은 차곡차곡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읽은 곳까지 책갈피를 꽂아 두고 다시 그 감각이 그리워지면 그곳을 ‘남몰래 펼친다’. 


사랑의 추억은 책이다


사랑의 추억에 갈피를 꽂고 펼쳐보기도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사랑의 추억은 책이다”라는 또 다른 은유가 자리하고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감각 기억은 그 자극이 끝난 뒤에 몇 초 내에 빠르게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각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좀 더 집중하고 노력한다면 그 기억은 단기 기억이 되어 20, 30초가량은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피나는 노력을 반복한다면 그 기억은 몇 분에서 평생까지 지속되는 장기 기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한계적이라 그 장기 기억도 언젠가는 내 약한 몸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이 사람은 연인에 대한 감각 기억이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람은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내 머릿속을 책으로 확장한다. 그의 책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수집한 감각이 담겨있다. 그것이 사랑의 추억이다. 그 추억은 이제 머릿속이 아닌 낭만의 상징인 책 속에 들어 있다. 이 세상에 이런 책을 집필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있다면 이런 책을 집필한 그는 정말 위대하다.


사랑의 추억이 적힌 책을 밤마다 펼쳐보니 그 사랑이 더욱 커지고 계속 ‘자란다’. 사랑의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내 마음을 나조차 모르고, 내가 모르는 그 마음이 어떻게 진행되든 그것은 내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샘솟고 자라나는 사랑의 마음을 과감히 느끼며 그냥 아파하고자 한다. 억지로 아프지 않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아픔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얻은 사랑의 마음과 느낌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인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슬픈 추억이든 모두 받아들인다. 어떻게 이런 용감함과 무모함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서둘려 안겨본 품속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이 따뜻한 품속이라는 한 가지 감각이 모든 아픔을 치유해 준다. 


사랑의 감정은 식물이다


‘자라나는 마음을 꺾어 버릴 수 없다’라는 것을 보면, 그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은 식물이다”라는 은유도 작용한다. 작은 화분에 씨앗을 뿌리면 새싹이 돋고 줄기와 가지가 자라고 결국은 꽃을 피운다. 그 꽃은 작은 화분에 홀로이 피어날 꽃이다. 홀로임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이 두려워 도중에 사랑의 가지와 줄기를 꺾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홀로 피어나는 사랑의 꽃이지만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촉감은 물리적 감각이긴 하지만 책 속에 기록된 감각이므로 영원할 수 있다. 영원히 자신을 지탱해 줄 그 사람의 따뜻한 품속이 있으니 그는 과감하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기로 한다. 


이 사람의 이별과 헤어짐은 서로 같은 곳을 향한다. 이별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보인다. 하지만 이별하는 이 두 사람은 ‘서둘러 뒤돌아’ 등을 보이지 말자고 한다.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자’라고 한다. 서로 정서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사랑하기 어렵다. 정서가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같은 장면에 대해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한 편의 시를 같이 읽고서 같은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정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마음을 가지려면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막 사귄 연인들이 커피숍에서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하지만, 서로 나란히 앉기도 한다. 서로 나란히 앉는 것은 같을 것을 보기 위함이고, 같은 것을 본다는 것은 서로의 정서를 맞추기 위함이다. 이별하는 이 두 사람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정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뒷걸음치면서까지 같은 곳을 보면서 서로의 행복과 건강을 빌어준다. 


피었다 지는 우리의 감정


우리가 비록 진지하게 사랑하는 감정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감정이란 원래 오래 지속되는 성질이 아니다. 사랑의 감정은 ‘피기’도 하지만 ‘지기’도 한다. 이 사람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계절이 피었다 지듯이 인간의 감정도 피었다 진다. 이것이 세상 원리라는 것을 그는 안다. 하지만 피고 지는 과정 자체가 일회적이지 않다는 것도 안다. 사랑의 감정은 피고 지지만, 그 피고 지는 과정은 ‘영원히’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사랑이라는 ‘같은 꿈을 꾼다’. 그리고 ‘꾸던 꿈을 미루지 않으려고’ 한다. 


이 곡을 들으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동경하는 모습이 아련히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몸과 기억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 그 불완전함을 깨달은 그는 사랑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애쓰는 ‘이성’의 멋진 어울림이 마침내 영원이라는 꿈을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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