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상상력을 위한 한걸음!
앨범: MONKEY HOTEL
발매: 2016.08.04.
작곡: 잔나비
작사: 잔나비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tc8-PxxTPY
지구별의 모든 사람들
하늘을 봐요
온 세상이 멈출 거예요
샛노란 광선을 쏘면은
음 내 생각엔
까맣게 덮인 저 먹구름
보기 좋게 걷힐 거에요
Make a wish
파란 하늘 꿈을 꾸는 건
음 내 생각엔
그건 모두를 위한 법이야
별들도 뒷걸음질 치다
이내 겁에 질려
하얗게 부서진 꽃놀이
우리 위를 덮을 거에요
Wish that you were here
Wish that you were here
Wish that you were here
눈이 멀은 많은 사람들
기울여 봐요
지저귀는 새들 소리에
밤의 나라를 떠날 거에요
Wish that you were here
Wish that you were here
Wish that you were here
까만 밤 물리쳐라
하늘 빛 품은 해야
흰 구름 몰고 오면
손뼉을 치자 모두
오늘 밤 끝 무렵에
보라빛 물들으면
잽싸게 물리쳐라
하늘 빛 품은 해야
어제는 모처럼 제주도에 다녀왔다. 여행이 목적은 아니었다. 제주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 요청이 있어서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제주도는 12월 초인데도 3, 4월의 봄 같이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따뜻했다. 포근한 기온을 잠시 몸으로 느낀 뒤 택시를 타고 논문 심사장에 도착했다. 다른 교수님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심사를 진행했다. 발표자는 논문의 개요 및 내용 소개를 마치고, 자신의 논문 주제와 관련된 음악을 잠시 감상한 뒤에 심사를 부탁한다고 하면서 노래 한 곡을 재생했다. 박사논문 심사장에서 노래를 듣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노래는 1994년에 발표된 조관우의 <하늘, 바다, 나무, 별의 이야기>였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뒷산엔 / 언제나 푸른 꿈이 살고 있었지 / 개울가 물놀이로 하루해가 기울어가고 / 풀벌레 노래 속에 꿈이 자라난 곳 / 너는 하늘을 사랑하니 나는 바다를 사랑해 / 분명 이 땅과 하늘의 주인은 바로 너희들이지 / 우린 너희들의 미래를 빌려쓰고 있을 뿐 …”로 시작되는 곡이었다. 발표자의 박사논문 주제는 영국의 작가 찰스 킹즐리가 1863년에 발표한 《물의 아이들》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생태언어학과 인지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해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생태적 상상력’을 고찰하는 논문이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현 상황에서 지구 환경에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논문이었다. 발표자는 이런 자신의 관심을 조관우의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심사는 매우 긍정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마치고 바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은 늘 연구실에서만 있었던 터라 어제저녁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고, 오늘 아침 늦게까지 푹 잤다. 개운한 몸으로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연구실에 왔다. 다른 작업을 좀 하다 불현듯 잔나비의 음악이 듣고 싶어 유튜브에서 잔나비 음악을 검색했다. “찐 잔나비 팬들만 듣는 잔나비 PLAYLIST (20곡)”이 눈에 들어와 클릭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곡이 끝나고, ‘지구별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첫 소절로 시작되는 세 번째 곡이 흘러나왔다. 그 곡은 <Wish>였다. 이 곡을 듣고 있으니 어제 논문 심사장에서 들었던 조관우의 <하늘, 바다, 나무, 별의 이야기>의 노래가 떠 올랐고, 어제의 논문 주제인 ‘생태적 상상력’과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잔나비는 먼저 ‘지구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구 환경에 관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하늘을 보라’고 애잔하게 외친다. 그 하늘은 내가 어제 제주도에서 봤던 화창하고 푸른 하늘이 아니다. 그 하늘은 ‘온 세상이 멈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고 있는 지구는 모든 것이 기계적 인과성보다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존재이다. 이러한 생태적 지구가 주인이고, 우리와 모든 생명체는 그곳에 손님으로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활동으로 지구의 생태계와 기후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시대가 진행된다. 이 인류세는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생물 다양성의 붕괴, 토지 및 수자원의 변화 등을 특징으로 한다. 소위 인류세라고 명명한 지금 지구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과 통제력은 전례 없는 수준이다.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며, 자원을 우리 인간에게 유리하게 형성하고 탈취하기 위해 엄청난 기술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구는 적당한 수준에서 인간이 반성하여 이러한 인류세의 분위기가 끝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묵묵히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오만함은 멈출 줄 몰랐다. 지구는 이제 노하기 시작한다. 푸르른 밝은 모습이 아닌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잔나비는 우리에게 ‘까맣게 덮인 저 먹구름’을 보고 반성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잔나비는 ‘샛노란 광선을 쏘면 까맣게 덮인 저 먹구름이 보기 좋게 걷힐 거에요’라는 바람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렇다면 ‘샛노란 광선’이란 뭘까? 그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노란 옷을 입고 노란 가방을 메고 노란 모자를 쓴 유치원 시절의 우리가 가졌던 마음이 화난 지구를 달래서 까맣게 덮인 먹구름을 걷히게 할 것이다. 어릴 적에 자연은 우리의 친구였다. 봄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뛰놀고, 여름에는 개울에서 물장구치고, 가을에는 떨어진 낙엽 속에서,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면서 자연과 함께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 삶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이기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몸은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고서 자연과 공감하는 시선을 보내고 교감하는 광선을 쏜다면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잔나비는 희망해 본다.
‘파란 하늘 꿈을 꾸는 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풍성한 자연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므로 그런 자연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기심의 성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특히 지구보다는 나의 편리를 먼저 생각한다. 타인뿐만 아니라 지구와도 협력해야 할 필요성과 영장류 주도의 이기심 사이의 긴장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이기적인 개인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도 없이 공익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긴장을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즉, 수자원이나 토지자원 등 공유자원의 이용을 개인의 자율에 맡기면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함에 따라 자원이 남용되거나 고갈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역시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아이들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잘 다가간다.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 자랑하면서 그 사람에게서 공감을 원한다. 주변 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내향적 행동이 아닌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외향적 행동이야말로 파란 하늘 꿈을 꿀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지금의 우리가 지구와 자연에 대해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별들도 뒷걸음질 치다 이내 겁에 질릴 것이고,’ ‘하얗게 부서진 꽃놀이 우리 위를 덮을 것이다.’ 잔나비는 자연의 화난 모습을 아직도 보지 못하는 ‘눈이 멀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 보라고’ 다시 한번 간절히 권한다. ‘지저귀는 새들’도 오염된 까만 ‘밤의 나라를 떠날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친구였던 새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 마음의 문을 열고서 ‘밤의 나라’를 직시해야 하고, 기후위기를 느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치부를 보려 하지 않는 회피적 태도로는 이런 위기는 극복되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책임지고 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방관적 태도도 정답이 아니다. 잔나비는 반복해서 외친다, ‘이제 모두 여기 현실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Wish that you were here).’ 여기는 위기를 맞이한 현재의 우리 지구이다. 회피하지 않고 방관하지 않으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아파서 삐걱거리는 우리의 지구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주고 안아주어야 한다. 영어에서 Wish that you were here는 가정법과거 구문이다. 과거에 당신이 아픈 지구 곁에 있었다는 것은 현재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다. 잔나비는 아직도 우리들 대부분이 이 지구와 함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지구의 생존을 생각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잔나비는 ‘하늘 빛 품은 해가 까만 밤 물리쳐주길’ 노래한다. 그리고 하늘 빛 품은 해가 ‘흰 구름 몰고 오면 모두 손뼉을 치자’라고 노래한다. 모두의 순수한 어릴 적 마음으로 힘을 모아 오늘 드디어 ‘밤이 끝날 무렵에’ 다시금 ‘보랏빛이 물들어’ 까맣게 되려 하면 ‘하늘 빛 품은 해가 잽싸게 물리쳐달라’고 노래한다. ‘하늘 빛 품은 해’는 순수한 어릴 적 우리 마음이다. 자연과 친구가 되려 하는 습성이 온몸에 배어 있는 마음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이 도시의 기후위기를 결국 극복한다. 그 결과 이 도시는 따사로운 봄 햇살과 가벼운 바람이 기분 좋게 우리 얼굴을 스치고, 새들의 지저귐도 들린다. 예상보다 새들도 많고, 나비까지 다시 날아오른다. 사방천지가 온통 초록이다. 나무와 식물만 가득해서 사실 도시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기후변화는 통제되고, 종의 대량 멸종도 막았다. 생명이 승리한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회복되었다. 여유롭고 희망찬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잠시 눈을 감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학수고대하던 승리의 기쁨을 누린다.
이것은 우리 모두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투쟁한 결과로 얻은 미래의 지구 모습이다. 그것은 밝은 미래이고 녹색의 미래이다. 지금의 우리를 위한 미래일 뿐 아니라 미래의 인류를 위한 미래이고, 수많은 종과 지구 자체의 미래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어린아이의 공감하고 협력하는 마음을 갖고서 이런 미래를 개척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제도가 개입한다. 즉, 인류 자체와 인류 문명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우리를 통제할 힘과 권한을 가진 세계 기구가 등장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등장하는 세계 기구를 일컬어 기술철학자 마크 코켈버그(Mark Coeckelbergh; 1975~ ) 교수는 ‘그린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리바이어던’이란 성경의 바다 괴물을 가리킨다. 특히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등 특정한 상황에서 충돌이 증폭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리바이어던’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리바이어던은 무력 사용의 독점권을 얻고 협력과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을 시행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글로벌 수준의 제도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몇 년간 코로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 이러한 강력한 제도와 리바이어던이 개입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그 위기를 잘 넘겼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잃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행동이 통제되면서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잃었다. 생존을 위해 자유를 희생한 것이다. 이제 기후위기에서 그린 리바이어던이 다시 개입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를 간직하려면 우리 개개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기후위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사고관에서 벗어나 지구상에 많은 생물 종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생태적 상상력을 간직한 아이의 공감적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