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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16. 2023

<굿바이 환상의 나라>

결국 환상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는 용기

앨범: 환상의 나라

발매: 2021.07.28.

작곡: 최정훈, 김도형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30dYJuvsqU


이룰 수 없는 꿈을 꿨다면

언덕 위의 바보를 자처하며,

어떤 이에게서 주워들은 승전가를

굳게 믿어왔다면 끝끝내 달콤하리라고.


그토록 부르던 별과 꿈, 그런 것들.

별은 과녁이었고 꿈은 그저 꿈이라 부르기에

알맞은 거였다고 말해줄래.


환상의 나라를 사랑하고자 했던 사내에게

현실의 아름다움은 독이어야만 했지

꼭 그래야만 했어

그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은 그래,

딱 세상이 너그러웠던 만큼 아팠어.

아니 사실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대로 뒀어.


이제 내가 믿어왔던 그 모든 것들,

난 환상이었다 부를 수 있어.

그러면서도 또 믿어볼래.

그것들을 환상이라고

그렇게 부르기까지의 그 시간들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래도 오늘 밤은 집에 가야겠어.

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photo-manipulation-digital-art-421405/



결국 환상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는 용기


현실과 타협하려는 한 사내 


우리는 어느 나이 때까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한 채 꿈과 환상을 추구하면서 ‘생활’할 수 있을까? 10대, 20대, 아니면 30대 초반? 흔히 30대가 되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묶여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로 복귀하는 듯하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아닌 타자를 위해 현실의 일을 하게 된다. 물론 가족을 위한 것이니 타자는 아니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가족은 나 자신은 아니니, 현실에게서 받은 그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이 곡에 등장하는 한 사내는 처음에는 자신이 추구하던 꿈이 이룰 수 없는 것임을 몰랐다. 아니, 성취 여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냥 하고 싶은 자기의 일을 하면서 이 현실에서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걸어갔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이 현실과 닿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의 몸은 현실 공간에 있지만, 마음은 환상의 가상 공간에 있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채 두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내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꿨다’라는 사실을 마침내 인식한다. 현실에서 도드라진 저 위의 환상 공간인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을 ‘바보’라고 부른다. 꿈을 꾸며 그 꿈을 향해 달려가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바보’로 결론 내려지는 순간이다. 꿈을 성취하여 감정에 복받쳐 부르는 ‘승전가를 굳게 믿어왔던’ 자신의 어리숙함과 작음을 인식한다. 저 언덕만 넘으면 꿈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어떤 이에게서 주워듣고는’ ‘달콤한’ 꿈만 향해 달려갔던 자신을 한심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토록 추구하며 불러왔던 ‘별과 꿈’, ‘그런 것들’이 사내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별은 목표가 아닌 ‘과녁’이었고, 찬란한 꿈은 ‘그저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내는 아직 자신의 꿈에 미련이 있는지 그 꿈의 위상을 이렇게 본인 입으로 떨어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별과 꿈이 그저 그런 것들이라고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꿈을 포기한 것이 자기 의지도 아니고 자기 책임도 아닌, 오로지 타인의 충고에 의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현실의 아름다움은 독이다


‘환상의 나라를 사랑하고자 했던 사내에게 현실의 아름다움은 독이어야만 했다.’ 사내는 꿈과 환상을 위해 현실을 부정해야 했다. 현실의 실용성과 효율성이 사실은 자신을 망칠 수 있는 유독한 속성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이 사내가 환상의 나라에서 사는 방법론이다. 사내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하여 꿈을 쫓았던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과 배중률(law of the excluded middle)을 전제한다. 모순율에 따르면, 한 사물은 어떤 자질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소유하지 않을 수 없고, 한 범주에 속하면서 동시에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배중률에 따르면, 사물은 어떤 자질을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않아야 하고, 사물은 한 범주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이분법은 흑백(黑白)의 문제로 귀결된다. ‘흑’은 나쁘고 틀린 것이며, ‘백’은 좋고 옳은 것이다. 처음에 사내에게 현실은 흑이었고 환상은 백이었다. 사내가 마음이 아픈 것은 좋고 옳은 환상의 나라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내는 ‘현실의 아름다움은 독이다’라는 은유를 받아들여야 자신만의 환상을 추구할 수 있다. 사내는 이 은유를 받아들일 때 고통스러웠지만, 이 은유를 벗겨내는 것도 그만큼 아픈 고통이었다. 현실을 독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는 사내에게 이 현실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상상이 된다. 이 현실의 아름다움에 취해 사는 사람들은 만족하며 사는데, 웬 사내가 자기들의 현실을 독이라고 부르니 이 사내를 차가운 눈빛으로 냉대했을 것이다. 그 차가움이 사내의 몸속을 비집고 들어가니 오장육부가 어는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환상을 추구할 때 받아들인 이 은유는 이제는 그 환상을 포기하려 하니 촌스러운 은유로 모습을 바꾼다. ‘그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은 딱 세상이 너그러웠던 만큼 아팠다’. 그런데 사내는 고백한다. 사실 자기 삶의 목적을 뒷받침하는 이 은유를 자기 몸에서 벗겨낼 때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벗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고 한다. 한 개념에 대해 나의 은유는 단순히 나의 인식이나 지식을 통해 내 속에 구축된 것이 아니다. 내 삶의 역사 내내 차곡차곡 단단히 쌓아지면서 내 속에 구축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은유는 결국 나의 부속물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이 은유를 벗겨내는 것은 결국 나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유지하고 싶어 하니 이 은유를 벗겨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끝내 환상의 나라를 떠나지 않는 사내 


사내는 자신이 ‘믿어왔던 그 모든 것들을 환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그 환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는다’. 허구의 환상으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꿈과 환상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성을 갖춘 환상의 ‘시간들’을 믿고 싶어 한다. 


환상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내면의 투쟁이 사내에게 보인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라고 환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되는 자신 속의 갈등으로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지친 상태이다. 그래서 ‘오늘 밤은 집에 가야겠어’라고 하면서 내면의 전투에 휴전을 선언한다. 


인제 보니 사내에게 현실과 환상은 이분법 논리를 따르지 않았다. 이분법에 속하는 두 대상은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흑백 논리이니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니 옳고 그름은 서로 교류를 하지 못한다. 사내의 세계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서로 교류한다. 전투가 치러지는 느낌이 있지만, 사실은 현실과 환상 간의 전쟁이 아니다. 사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일 뿐이다. 둘 간의 전쟁이 아닌 혼자서의 갈등이라는 전쟁인 것이다. 사내에게 있어서 현실과 환상은 완전히 다른 두 영역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두 영역이라면 사내는 어떨 때는 현실의 나라로 가고 어떨 때는 환상의 나라로 갈 수 없다. 인간인 사내에게는 그런 공간 이동 능력이 없다. 사내에게 있어서 현실과 환상은 자기만의 큰 세계 속에서 서로 인접해 붙어 있다. 그 둘을 떼어 놓는 엄격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이 붙어 있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경계일 뿐이다. 


현실과 환상 모두 사내의 것이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받아들이고 환상을 환상으로 치부하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이 두 영역을 모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 사내뿐일까? 우리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환상을 포기하거나 상대적으로 환상이 가볍다고 해서 쉽게 그 환상을 날려버리지 말아야 한다. 고뇌와 갈등 속에서 투쟁하는 사내의 모습에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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