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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13. 2023

<나의 기쁨 나의 노래>

슬픔을 달래주는 무위적 마음

앨범: 전설

발매: 2019.03.13.

작곡: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2eQObB1IDk


별 볼 일 없는 섭섭한 밤도 있어요

오늘도 그런 밤이었죠

창을 열고 세상 모든 슬픔들에게

손짓을 하던 밤     


노래가 되고 시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만큼만 내게 오길

뒤척이다 잠 못 들던 밤이 있는 한

닿을 수 있어요     


나의 기쁨

나의 노래되어 날아가

거리를 나뒹구는 쉬운 마음 되어라     


이 삐걱이는 잠자리가 나는 좋아요

제 맘을 알 수 있나요

버려지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 있어요     


나의 기쁨

나의 노래되어 날아가

거리를 헤집으며 텅 빈 눈과 헛된 맘과

또다시 싸워 이길

나의 기쁨 나의 노래야

거리를 나뒹구는 쉬운 마음 되어라 

출처: https://pixabay.com/photos/guitar-guitarist-music-756326/


무위적 마음이 슬픔을 달래주다


공감의 손짓


잔나비의 이 곡을 처음 듣고는 너무 좋았다. ‘너무 좋다’는 말이 막연해 나의 이 느낌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어 내 마음속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부드럽지만 무겁고 장엄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움이 장엄함으로 이어지는 이 곡에 관한 글을 적어보려고 하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 두려움은 이 곡을 작사한 잔나비 최정훈의 마음이 너무 부드럽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혹여나 내가 에세이를 쓴답시고 이 곡을 만지다 그의 부드러움을 터트려 그의 장엄함까지 가는 길을 차단해 버리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며칠간 이 곡을 애지중지하면서 그냥 반복해서 듣기만 했다. 그러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이제야 이 글을 적고 있다. 


이 곡의 제목을 보면 잔나비가 자기 노래에 어떤 태도인지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다. ‘나의 노래’는 ‘나의 기쁨’이라고 소곤거린다. 그러면서 잔나비가 어떻게 노래를 만드는지 잔잔히 묘사하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섭섭한 밤’이다. 화려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밤이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밤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시간도 밤이다. 하지만 잔나비에게는 밤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섭섭한 밤’이었다. 오늘 이 밤도 여느 때처럼 그러한 밤이다. 이 밤에 ‘창을 열고 세상 모든 슬픔들에게 손짓을 한다’. 여기에서의 ‘슬픔들’이란 슬픈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슬퍼해 본 사람만이 상대의 슬픔을 공감하므로, 지금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는 잔나비는 길거리를 걷고 있는 슬픈 사람들에게 공감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잔나비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이들의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노래를 불러주고 시를 읊어주는 것이다. ‘노래가 되고 시가 될 수 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잔나비에게 잠 못 드는 밤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 만한 노래와 시가 자기에게 다가올 때까지 잔나비는 밤에 뒤척인다. 이런 뒤척임 중에 자신과 타자 사이의 장벽을 없애주는 공감 세포인 거울뉴런(mirror neuron)이 잔나비에게서 계속 활성화된다. 거울뉴런이란 우리 뇌의 전운동피질(premotor cortex)과 하두정피질(inferior parietal cortex)에서 발견되는 신경세포이다. 이 신경세포는 우리가 특정 행동을 할 때와 다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관찰할 때 모두 활성화된다.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뇌의 거울뉴런이 내부적으로 그 행동을 시뮬레이션하여 이해하고 모방할 수 있다. 이러한 거울뉴런은 공감과 관련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신경회로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미러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거울뉴런의 활성화에 따른 결과로 잔나비에게서 공감 가득한 노래가 떠 올랐다. 이제 이 노래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노래는 잔나비의 기쁨이 된다. 이 노래는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진지하지도 않다. 이 노래는 ‘날아가’ 슬픈 사람들의 장소인 이 ‘거리를 나뒹굴’ 수 있을 만큼 가볍다. 이 노래는 잔나비가 슬퍼하는 사람들과 공유해서 만들어낸 만큼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 노래는 잔나비의 ‘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무위적 마음과 그 결실인 음악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생각하면서 잠을 뒤척이다 보니 침대가 삐걱거린다. ‘이 삐걱이는 잠자리가 나는 좋아요’라고 말한다. 이런 자기 마음을 여러분들도 알 수 있냐고 묻는다. 과연 이런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자기를 위한 노래가 아닌 나만큼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잔나비는 이 노래를 만들 때 자기의 마음을 ‘버렸다고’ 했으니 자기를 의식하지 않았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나비의 마음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쉬운 마음이라고 했다. 잠자리에서 잠이 들지 않고 뒤척임이라는 움직임을 또한 이어갔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며, 동적인 움직임을 유지한 채 음악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었으니 효율적인 마음이기도 하다. 


이는 한마디로 무위(無爲)이다. 흔히 무위란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나는 이 잔나비의 마음에서 ‘무위적 마음’을 보았다. 무위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쉬운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동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런 속성을 가진 무위는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효율성을 지닌다는 것이 무위의 특징이다. 잔나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위적 마음을 지녔지만 그래도 결국은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 이런 노래로 슬픈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효율성을 달성한 것이다. 


잔나비는 자기의 기쁨인 자기의 노래가 날아가 ‘거리를 헤집으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텅 빈 눈과 헛된 마음과 또다시 싸워 이겨주길’ 바라고 있다. 희망이 없어 공허한 사람들의 눈빛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승부욕으로 무장한 마음이 아니라 ‘거리를 나뒹구는 쉬운 마음’이다. 즉, ‘무위적 마음’이다. 이 마음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애쓰지 않지만 결국은 자연스럽게 승리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무위적 마음의 최종 결과는 효율성이기 때문이다. 그 효율성은 바로 이 싸움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밖에 없는 승리인 것이다. 


우리의 몸은 행동하고 본능에 충실하지만, 마음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 무위적 마음에서는 이성이 잠시 작동을 멈춘다. 이처럼 이성의 작동 정지 상태에서는 자기를 중심에 두고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공감이 되어 만족하므로 애써 나를 중심에 둘 필요가 없다. 잔나비는 모두가 잠든 이 밤 창밖의 거리만 보았을 뿐이다. 


노래에 대한 잔나비의 마음은 가볍고 쉽지만 참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내가 부르고 싶은 내 노래를 만드는 것은 흔히 주관적 작업이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나만 바라보며 만드는 노래는 타인의 공감을 얻기가 힘들다. 잔나비의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는 타인을 끌어들이고, 끌려오는 타인을 포근히 안아준다. 타인은 타인대로 자기만의 주관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슬픔을 만지면서 공유하는 두 주관적 주체들이 만났다. 이제 이 두 슬픔은 사적 영역을 뛰어넘어 공적 영역에 들어가서 객관성을 확보했다. 이런 객관성은 단순히 이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면서 생겨난 사람 냄새가 나는 포근한 객관성이다. 슬픔에 넘어져도 포근한 잔나비의 노래가 부드러운 쿠션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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