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함의 미학
앨범: See Your Eyes
발매: 2014.12.16.
작곡: 최정훈, 유영현, 김도형
작사: 최정훈, 유영현, 김도형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lUxneuzsdo
복잡한 내 마음
알릴 길이 없어
내 표현력이 좀 부족한지
아무말도 떠오르지 않아
하얗게 취한 밤
날 모르던 달빛도
내 비틀거림에 안쓰러운지
날 환하게 비춰주네
난 그 달빛의 동정 섞인
저 환한 빛이 싫어져
조급해진 내 마음을
못 쫓아간 나의 취한 발걸음
하얗게 취한 밤
날 모르던 달빛도
내 비틀거림에 안쓰러운지
날 환하게 비춰주네
난 그 달빛의 동정 섞인
저 환한 빛이 싫어져
조급해진 내 마음을
못 쫓아간 나의 취한 발걸음
결국엔 나자빠진 나의 몸
사람마다 같은 노래를 듣고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리기도 한다. 잔나비의 이 곡을 듣고 나는 《장자》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구절은 밤새 술을 진탕 마신 후에 수레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이야기이다. “취객은 매우 빠른 수레에서 떨어져도 비록 아프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뼈마디와 힘줄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그들만큼 다치지는 않는다. 그는 수레를 타는 것도 몰랐고 떨어지는 것도 몰랐으며, 죽는다는 생각이나 산다는 생각, 놀라거나 두려운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수레에서 떨어지는 사건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내 후배는 이 곡을 듣고 다른 노래가 떠올라 그 노래를 지금 이어 듣고 있다고 했다. 뭐냐고 물었더니 신촌블루스의 〈봄비〉라고 했다. 유튜브에서 검색해 들어보니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울적한 노래였다.
잔나비의 〈달〉과 내가 떠올린 《장자》 이야기에서는 ‘술’과 ‘취객’이 비슷하게 등장한다. 잔나비의 〈달〉과 후배가 떠올린 신촌블루스의 〈봄비〉에서는 한 남자가 봄비/달빛을 맞으며 외롭게 걷는 장면이 비슷하다. 장자의 취객이든, 달빛 아래 외롭게 걷고 있는 남성이든, 술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고 걷는 잔나비의 최정훈이든, 이들 모두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다.
‘사연’이란 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다른 한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다른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생긴다. 이 곡의 작사를 맡은 최정훈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 사연이었다. 최정훈은 그 이별로 슬펐고, 그 슬픔의 기운을 받아 이 곡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나는 어제 한 주제를 놓고 동료 아홉 명과 토론을 벌였다. 나의 의견과 나머지 아홉 명의 의견이 극과 극을 이루었다. 나는 내 의견이 과거의 역사적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너무 낯설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토론 후에 난 허탈했고 허무함이 몰려왔다. 이 허탈감의 기운으로 지금 나는 잔나비의 〈달〉을 듣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잔나비 최정훈의 사연과 나의 사연으로 우리 둘은 각각 슬픔과 허탈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 두 감정은 결국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최정훈과 연인은 1대1 관계이고, 나와 동료들은 1대9 관계이다. 최정훈은 연인에게 버림받아 혼자가 되었고, 나는 동료 아홉 명에게 버림받아 혼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혼자인 상태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된 상태에서는 외로움이 우리를 엄습하고 그 외로움에 무릎을 꿇고 무너지게 된다.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고 반성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반복적인 생각은 우리의 외로움을 더욱 키울 뿐이다.
최정훈과 나는 돌아선 타인(들)에 의해 외롭고 ‘복잡한 마음’이다.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 있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런 뒤엉킨 마음을 풀어내지 못해 그 마음을 ‘알릴 길이 없다’. 외로움에 짓눌려 내 이성이 마비되었고, 그로 인해 ‘표현력이 부족해져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과 언어는 함께 활동하는 작용이다. 논리와 합리를 따라가면 답이 보이고 그 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합리성이 결핍되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하여 마음속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성과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런 외로움에 술을 한잔 마셔서 복잡한 마음을 ‘하얗게’ 만들어버린다. 이미 외로움으로 마음의 작용에 오류가 생겼는데, 여기에 이성과 몸까지 마비시키는 술까지 마신다. 외로움과 술이 마음에 더해져 그 마음은 모양과 색깔을 잃었다. 이제 이성은 온데간데없고 몸도 제구실하지 못하여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춰준다.
타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철저하게 외로워진다. 아니, 철저한 외로움을 추구한다. 외로움을 달래려 다른 이에게 손을 뻗지 않으며, 나의 외로움을 알고 나를 달래주기 위해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면 그 손을 잡지 않는다. 그리고는 더욱더 큰 외로움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철저한 외로움이다. 외로움에 취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우리가 혹여나 넘어져 마음과 몸을 더 크게 다칠까 봐 달빛이 우리를 비춰준다. 철저한 외로움의 주인공은 그 달빛의 착하고 고운 의도를 동정심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그 달빛의 동정 섞인 환한 빛이 싫어져’ 나를 위한 외로움 공간으로 더욱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간다. 이런 ‘조급해진 마음’을 ‘취한 발걸음이 쫓아가지 못한다.’. 취해 비틀거리는 내 발이 날 지탱하지 못해 ‘결국엔 내 몸은 나자빠진다’.
최정훈과 나는 술에 취해 걷다가 몸이 나자빠지고, 《장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밤새 술을 진탕 마신 후에 수레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매우 빠른 수레에서 떨어진다. 술에 취해 우리 몸이 나자빠진 것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달빛과 내 지인의 동정이 싫어서 마음이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장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수레에서 떨어진 것은 자기를 태우고 가던 수레는 빠르게 달리지만, 주인공의 몸은 정지 상태여서 그 빠른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몸의 나자빠짐과 수레에서 떨어짐의 원인은 ‘술’과 ‘술취함’이다.
외로움과 술에 취한 최정훈과 나, 그리고 《장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자빠지고 수레에서 떨어지면 아프기는 하겠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왜일까? 술은 우리 몸의 작용을 일시 중지시키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뼈마디와 힘줄, 근육이 뻣뻣하고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하다. 술에 취한 우리의 몸이 다른 것에 부딪혀도 우리 몸은 유연한 쿠션 같은 상태이므로 다치지 않는다. 외로움에 상처받은 우리 마음에도 술취함은 똑같은 역할을 한다.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은 자아의 저주(curse of the self)에 시달린다.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이성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을 이용해 과학기술 발전을 이룩한 위대한 존재이다. 그 어느 동물도 우리처럼 이런 위대한 업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동물은 이성을 발휘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은 절대 걸리지 않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것이 자아의 저주라는 병이다. 자아의 저주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우리의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병이다. 자아의 저주에 걸린 사람은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들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 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만약 내가 뭇 짐승 중 한 마리 고양이라면, 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리는 이 의식적인 자아 인식의 병에 걸리고 싶어 하지 않아서 차라리 동물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외롭고 복잡한 생각들이 원인이 되어 걸리는 자아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카뮈는 동물로 태어나는 전략을 제안했지만, 이 해결책은 현실상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깊은 잠을 자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잠이라는 것이 내 의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또한 쉬운 해결책은 아니다. 격렬한 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다. 격렬한 운동 후 몸이 너무 피곤해 침대에 몸을 던지자마자 깊은 수면에 빠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다. 하지만 평소에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이 또한 효과가 없다. 최정훈과 나는 술을 선택했다. 술에 취하면 몸의 작동을 일시 중지시켜 몸이 비틀거리게 되지만, 인간의 뇌 부위 중에서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담당하는 부위인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도 작동을 잠시 중지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마음은 내 몸과 마찬가지로 흐물흐물 비틀거리지만, 이성의 작용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다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술취함의 미학이다.
나는 술취함의 아름다움에 다시 취해 철저한 외로움의 내 공간에서 아직 나오질 못하고 있다. 외로움에 취해 마음의 문이 닫히고, 술에 취해 몸이 나자빠져 있다. 취함으로 인한 닫힌 마음과 나자빠진 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심할 정도로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저녁에 마신 술에 취해 마음과 몸이 아주 잠깐 작동을 중지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술이 깨면서 정신이 맑아질 것이다. 외로움에 취해 닫힌 마음이지만 이 또한 잠시 닫힌 마음이니 다음날이면 곧 열릴 것이다. 그러니 닫힌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으련다. 그냥 철저한 외로움에 잠시만이라도 편하게 갇혀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