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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11. 2023

<우리 애는요>

아이와 어머니의 이중적 긍정성

앨범: 전설

발매: 2019.03.13.

작곡: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sGvKpY59YM


어린애야 아직도 난

나사 빠진 애처럼

구는 게 재밌어

누가 뭐라 하면 그게 더 좋아     


어버버버 더듬더듬

내 말도 천재 같고 멋이 있어

고치지 않을 거야

조금 답답해도 참아야 해     


우리 애는요

관심이 필요한 아이예요

덜떨어져 보여도 알고 보면

멋진 애예요     


불안불안 껌뻑껌뻑

내 눈도 불쌍해 보이고 좋아

걱정이 많아 그래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줘     


우리 애는요

사랑이 필요한 아이예요

덜떨어져 보여도 알고 보면

멋진 애예요     


멍청한 장난처럼

짓궂은 농담처럼

내 친구가 되어줘

늘 나를 향해 서 줘

곁에 있어줘     


비겁한 변명처럼

어설픈 핑계처럼

나의 편이 되어줘

늘 나의 뒤에 서 줘

곁에 있어줘     


내 친구가 되어줘

늘 나를 향해 서 줘

내 곁에 있어줘

출처: https://pixabay.com/photos/forest-hiking-kids-children-people-386751/


아이와 어머니의 이중적 긍정성


어린애의 긍정 에너지


잔나비 최정훈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린다. 그는 방문 너머로 어머니와 선생님의 전화 통화를 엿듣는다. 학교에서 천방지축인 자신의 행동이 걱정되신 선생님께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던 모양이다. 선생님의 걱정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애는요, 사랑이 필요한 아이예요. 덜 떨어져 보여도 알고 보면 멋진 애예요.’ 어른이 된 지금 최정훈은 내 편인 어머니가 자기 곁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든든함을 느낀다. 


지금의 최정훈은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아직도 어린애’인 그는 ‘나사 빠진 애처럼 구는 것을 재밌어 한다’. ‘누가 뭐라 하면’ 오히려 ‘그게 더 좋아’라고 한다. 어린아이는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불완전하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과 같은 자신의 모습이 좋다고 해맑게 웃는다. 이런 그에게서 긍정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다. ‘어린애’는 ‘어린아이’의 준말이다. ‘어린아이’가 격식을 갖춘 표현이라면, ‘어린애’는 격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난기와 유쾌함의 뉘앙스를 풍기고 매사에 긍정적이다. ‘어린아이’와 ‘긍정성’이 합쳐져 나온 것이 최정훈이 말하는 ‘어린애’이다.


뇌과학에서 바라본 아이의 뇌


겉으로 부자연스럽고 뭔가 어리숙한 어린아이의 모습은 뇌과학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뇌과학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 최대한 요약해서 짧게 정리할 예정이다. 다소 어렵다고 느껴지고 지루하더라도 조금만 버텨주길 기대하며 시작해 본다. 


어른의 뇌는 태어나서 최소한 20년이 지나야 완성된다. 태어나면서부터 2년 정도가 되면 후두엽(occipital lobe)이 완성된다. 뒤통수엽이라고도 불리는 후두엽은 시지각, 사물과 장면 인식, 시각적 환경 내에서 공간 관계 이해 등 우리가 주변 세계를 지각하고 해석하는 능력에 필수적이다. 태어나서 6년이 지나면 두정엽(parietal lobe)과 측두엽(temporal lobe)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마루엽이라고도 불리는 두정엽은 감각 처리, 공간 지각, 공간 탐색 및 다양한 고등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등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사물 간의 공간적 관계를 이해하며, 신체에서 오는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뇌 부위이다. 관자엽이라고 불리는 측두엽은 청각 처리, 언어 이해, 기억 형성, 고차원적 시각 인식, 감정 처리, 공간 지각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다. 3년에서 12년 사이에는 전두엽(frontal lobe)이 형성된다. 이마엽이라고 불리는 전두엽은 실행 기능, 운동 조절, 언어 생산, 작동 기억, 판단력, 의사결정, 감정 조절, 사회적 행동 등 광범위한 인지 기능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전두엽의 앞부분을 덮고 있고 눈과 이마 바로 뒤에 있는 뇌 부위인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데 20년 이상이 걸린다. 이 전전두피질은 가장 늦게 형성된 전두엽의 부위라서 전두엽의 기능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전전두피질 이전 전두엽의 기능은 어린아이에게 국한되고, 좀 더 고차원의 인지 기능은 어른의 전전두피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전전두피질은 이성과 논리, 합리성, 언어를 담당하는 뇌 부위이다. 


다소 어려운 용어들이 막 쏟아져 나와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부터는 어린아이와 전전두피질에만 집중하면 좀 편해질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전전두피질이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합리성이나 논리성이 부족해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성숙해 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아이에게 이런 전전두피질의 이성적 특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우리 애는 관심이 필요한 아이예요’라는 말로 자기 아이가 생물학적으로 아직 어린아이라고 한다. 하지만 ‘덜떨어져 보여도 알고 보면 멋진 애’라고 긍정의 평가를 한다. ‘불완전성’을 멋지다고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완전한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가 뭔가 부족한 행동을 하고 있고, 그런 행동에서 아이의 장점을 찾아낸 어머니는 그 자체를 멋진 것으로 평가한다. 어린아이의 어리숙함에서도 멋진 모습을 찾아내는 어머니에게서도 똑같이 긍정의 힘이 비친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창의적 사고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어버버버 더듬더듬’하다. 아이에게 이성, 논리, 합리, ‘언어’의 자리인 전전두피질이 불완전하므로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말도 천재 같고 멋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긍정성이 또 한 번 드러난다. 흔히들 ‘천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IQ가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천재와 연상되는 개념으로 ‘창의성’이 있다.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창의적으로 사고하라’라고 할 때 영어에서는 ‘Think out of the box’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박스 안이 아니라 박스 밖에서 사고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박스란 무엇일까? 주어진 틀 또는 제도권이다. 제도권 내에 갇히지 않고 그 틀을 벗어나 사고하는 것이 창의적 사고이다. 이 아이는 학교라는 틀에서 봤을 때는 뭔가 특이하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모습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 틀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도 한다. 여하튼 그는 학교라는 제도권 외부에 있다. 그런 아이의 학교생활을 걱정하신 선생님께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도 제도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점에서는 아이와 닮았다. 우리 애는 나름대로 ‘멋진 애예요’라고 선생님께 맞받아친다. 내 편인 어머니가 옆에 있으니, 아이는 자기 언어를 고치고 싶은 마음이 없고, 조금 답답해도 자기도 참겠지만 남들에게도 그냥 참아달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절친인 아이와 어머니


아이는 ‘불안불안 껌뻑껌뻑하는 내 눈도 불쌍해 보이고 좋아’라고 말한다. 이것은 ‘걱정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 자기를 ‘사랑으로 보듬어줘’라고 호소한다. 열두 살에 전두엽은 완성되지만, 전전두피질까지는 10년가량 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의 완전한 모습에 안착할 수 있을지 얼마나 걱정이 많겠는가? 불안해하면서 눈을 껌뻑거리는 아이를 어머니가 사랑으로 꼭 보듬어준다. 그리곤 기다림을 지속하는 아이의 옆에서 파이팅을 외쳐주면서 아이의 편을 들어준다. 


아이와 어머니는 모자 관계이지만 친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서로 ‘멍청한 장난’도 치고 ‘짓궂은 농담’도 주고받는 걸 보니 서로 절친이 분명하다. 아이는 전전두피질이 완성되어 이성의 힘을 갖추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 힘이 없는 자기를 향해 서 있어 주고 곁에 있어 달라고 호소한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실수를 하는 아이가 ‘비겁한 변명’도 하고 논리성이 없는 ‘어설픈 핑계’도 되겠지만 그래도 ‘내 편이 되어달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언제나 자기 ‘뒤에 서서’ ‘곁에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아이를 향해 서 있든, 뒤에 서 있든 어머니는 아이 곁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아이와 어머니 간에 접촉은 없다. 아이가 무서워하고 힘들어한다고 해서 아이를 업고 목적지로 달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치 친구처럼 곁에 있어 준다. 어머니는 잘 닦여진 포장도로로 아이의 손을 잡고 가지 않는다. 그 길로 가면 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이가 숲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산딸기는 놓치게 된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다. 아이가 덤불숲에서 산딸기를 따 먹으면서 가는 그 모습을 어머니는 옆에서 동행만 해 줄 뿐이다.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긍정 


잔나비의 이 곡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내용을 생각나게 한다. 그 내용은 인간 정신의 변화 단계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가지 단계로 변화한다고 본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이다. 낙타는 주인에게 절대복종하고 비판하지 않으며 겁이 많다. 두 번째 단계는 ‘사자’이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과 자신이 사막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고자 한다. 낙타의 단계에서는 주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지만 사자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려고 한다. 사자의 단계는 상당히 고독하고 불안함이 엄습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어린아이’이다. 니체는 궁극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아이는 매 순간을 즐기고, 나쁜 일도 금방 잊어버리는 순수함을 지녔다.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삶을 이끌어가려 한다. 니체의 말을 빌려보자.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긍정적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Dionysus)의 모습을 닮았다. 디오니소스는 말썽꾸러기이고, 자유분방하고 야생적이며, 행동이 잘 예측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아이의 긍정성과 관련해 니체 철학의 핵심은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디오니소스가 ‘무질서’의 화신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는 음악과 조화, 수양을 자신의 속성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떤 형태의 ‘질서’에 의존한다. 결국 니체가 자기 철학의 기반으로 삼는 디오니소스에게는 잠재된 질서가 있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에게 비추어 아이의 거룩한 긍정에 대해 말했다면, 잔나비의 이 곡은 아이의 긍정과 어머니의 긍정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긍정이야말로 니체를 넘어서는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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