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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Dec 05. 2023

<늙은 개>

반려견의 포스트휴먼 세계

앨범: 잔나비 소곡집 Ⅰ

발매: 2020.11.06.

작곡: 최정훈, 김도형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9AOWRE1EWRE


늙은 개야 늙은 개야

뛰어볼래 소파 위로

일곱 살 작은 나를

무찌르던 이를 보여줘     


국에 밥 말아 줄까

치킨을 시켜 먹을까

엄마께 혼난 대도

사람 밥이 맛있잖니     


기억하니 친구야

우리 쫓던 무지개를

나는 다 잊었는데

넌 아직 쫓고 있구나     


국에 밥 말아 줄까

치킨을 시켜 먹을까

엄마께 혼난 대도

사람 밥이 맛있잖니     


가을 겨울 지나고

다음 봄이 올 때쯤엔

무럭무럭 자라서

귀여운 꽃이 되어라     


국에 밥 말아 줄까

치킨을 시켜 먹을까

엄마께 혼난 대도

사람 밥이 맛있잖니     

어떤 꽃을 피울 거니

출처: https://pixabay.com/photos/friends-dog-pet-woman-suit-sunset-3042751/


반려견의 포스트휴먼 세계 


한 선배의 눈물과 슬픔     


어제저녁에 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선배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전국 맛집을 탐방하는 모임의 한 회원이다. 모임이라고 해봤자 내 대학 시절 친구를 포함해 세 명이다. 내 친구와 그 선배는 서로 근처에 살기 때문에 매주 스크린 골프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만남을 유지한다. 하지만 나는 생활하는 지역이 달라 카톡이나 전화로 두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선배는 몇 년 전에 중학생이 된 딸아이의 집요한 요구에 못 이겨 애완견 단비를 입양했다. 처음에 선배는 단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오면 아내와 딸보다 단비가 더 반겨주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단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갔다. 사실 그 선배는 다른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퇴직 후의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문득문득 가슴이 꽉 막히는 증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단비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단비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기침도 계속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데려가 보니 관절염과 기관지 협착증이 있었고 그 원인은 노화였다. 치료를 받고 돌아와 집에서 아픈 단비를 돌보는데 선배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어쩌면 단비가 자신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선배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선배의 슬픔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고 싶었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는 많은 말보다 그의 슬픔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잔나비의 <늙은 개>라는 곡이 생각나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선배는 제목만 봐도 마음이 아파서 못 듣겠더라는 답장을 주었다. 나는 제목은 늙은 개이지만 그 늙은 개 초롱이가 남기고 간 딸 삼순이를 보며 쓴 곡이기도 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천천히 들어보라고 답해주었다.


슬픔이 밝음으로 승화되다     


그렇다, 이 곡은 잔나비의 최정훈이 다섯 살 때부터 키우던 초롱이라는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초롱이의 딸 삼순이를 보며 쓴 곡이라고 한다. 이 곡에서는 어미 초롱이도 등장하고 어린 삼순이도 나온다. 그런데 제목은 ‘늙은 개’이다. 어린 삼순이에게 말을 걸고 같이 장난치면서 놀지만, 이 모든 활동은 늙은 개인 초롱이에게 그대로 투사된다. 죽은 초롱이와 살아 있는 그의 딸 삼순이가 핏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삶과 죽음 또한 연결되어 있다. 최정훈은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대로 죽음으로 전이될 수 있다. 결국 그는 초롱이와 삼순이 둘 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정훈은 죽음과 슬픔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의 가사와 리듬을 통해 듣는이에게 생동감과 유쾌함도 선사한다. 이는 굳이 세상을 떠난 초롱이에 얽힌 슬픔을 감추기 위한 시도만은 아니다. 결국 <늙은 개>라는 곡에는 죽음과 삶이 잘 융합되어 구현되었고, 역설적이게도 그 짧은 노래 속에서 죽음이 삶으로, 슬픔이 유쾌함으로 간단명료하게 승화된다.


초롱이에 대한 인격화     


어린 최정훈은 ‘늙은 개야 늙은 개야’라고 하면서 초롱이를 부른다. 초롱이에게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와’ ‘일곱 살 작은’ 자기와 전쟁놀이하자고 제안한다. 자기에게 ‘이를 보여주면서’ 으르렁거리라고 한다. 강아지가 주인에게 보내는 신호 중에는 ‘플레이바우’라는 신호가 있다. 강아지가 주인이나 다른 개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로 두 앞다리를 바닥으로 낮춘 뒤 엉덩이를 하늘로 향하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함께 놀자는 강아지의 플레이바우 행동이다. 이러한 플레이바우를 할 때 강아지는 꼬리를 위로 향한 채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짖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지금은 초롱이가 어린 소년과 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가 초롱이와 놀고 싶어 한다. 


어린 소년은 초롱이의 이빨을 ‘이빨’이라고 하지 않고 ‘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언가를 물거나 음식물을 씹는 데 사용하는 척추동물의 기관인 ‘이빨’은 ‘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서, 동물의 경우에는 이 기관을 ‘이빨’이라고 하고 사람의 경우에는 ‘이’라고 부른다. ‘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니 어린 소년은 초롱이를 개가 아닌 자기의 친구로 여기고 초롱이를 인격화한다.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휴머니즘(humanism)에서 개는 인간과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 개는 가축 몰이, 재산 보호, 사냥 보조 등 인간의 삶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휴머니즘 이후의 세계인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서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술, 인공지능, 최첨단 기계가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면서 인간과 기계를 대등하게 여긴다. 더 나아가 어떤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는 동물도 인간과 대등하게 보면서 동물에게도 ‘인권’, 즉 ‘동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롱이에게 ‘이빨’이 아닌 ‘이’를 드러내라고 조르면서 초롱이와 놀고 싶어 하는 어린 최정훈은 자연스럽게 포스트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어린 소년은 자기가 먹는 밥이 맛있으니 초롱이에게도 먹이고 싶어 한다. 그는 어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국에 밥 말아’ 초롱이게 주고, 어린 시절 최고의 음식인 ‘치킨을 시켜’ 초롱이와 나눠 먹으려고 한다. 어린 소년에게 초롱이는 애완견이 아닌 자기랑 노는 친구, 즉 의인화되었으므로 사람이 먹는 음식을 초롱이에게 권한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사람의 몸과 개의 몸은 다르다. 그래서 반려동물에게 사람이 먹는 음식을 주면 초롱이와 같은 개에게는 건강상 좋지 않다. ‘엄마께 혼난 대도’ 초롱이에게 맛있는 것을 주려는 어린 소년은 작은 포스트휴머니스트이다.


어린 소년은 초롱이를 ‘친구’라고 부른다. 둘이 무지개를 쫓던 날을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자기는 그 일을 ‘다 잊었는데 넌 아직 쫓고 있구나’라는 말에서 둘의 공간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무지개는 대기 중 수증기에 의해 태양광선이 굴절되고 반사되고 분산되면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이면서, 하늘에서 태양이 위치한 반대편에 형성되어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가상 현상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 세계에 있으면서 무지개를 잊었지만, 초롱이는 현실 공간이 아닌 가상 공간에서 아직도 무지개를 쫓고 있다. 결국 초롱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문득 어린 소년은 초롱이가 자기 옆에 없음을 깨닫는다. 슬픔과 절망이 몰려오지만, 현실에서 사람 밥을 같이 나눠 먹고 싶어 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둘의 분리를 망각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어린 소년은 초롱이가 남기고 간 딸 삼순이를 본다. 아직 어린 삼순이다. 어린 삼순이를 보면서 ‘가을 겨울 지나고 다음 봄이 올 때쯤엔 무럭무럭 자라서 귀여운 꽃이 되어라’라고 말한다. (사실 최정훈은 가사의 이 부분은 어린 삼순이도 죽고 난 뒤 다시 썼다. 그래서 무지개다리를 건넌 삼순이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하는 노래이다.) 또한 그에게 어린 삼순이는 애완견이 아니라 작은 꽃이기도 하다. 어린 삼순이가 너무 여리고 약해 보여 혹여나 잘못 만지면 똑하고 끊어질 것 같다. 어쩌면 그 소년은 동화 《강아지똥》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자기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던 강아지똥이 민들레를 만난다. 강아지똥이 민들레를 품어주고 자기가 거름이 되어서 민들레 꽃을 피우는 것으로 내용이 마무리된다.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일부가 되듯이,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서 어린 삼순이는 꽃으로 개념화된다. 


어린 소년은 가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을 건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가늘고 여린 꽃을 닮은 삼순이가 이쁘고 튼튼하게 자라주길 원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어떤 꽃을 피울 거냐고’. 《강아지똥》 동화에서처럼 민들레 꽃을 피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삼순이는 튼튼하게 자랄 것이다. 그는 초롱이와 마찬가지로 삼순이도 다 자라면 삼순이를 인격화하면서 같이 국에 밥 말아 먹고 치킨 시켜 먹자고 약속한다. 


현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내 선배의 단비, 저 먼 가상 공간으로 이동한 초롱이, 초롱이가 미래를 위해 남겨 놓은 삼순이, 이 세 친구는 우리의 시간을 닮았다. 초롱이는 과거이고, 단비는 현재이고, 삼순이는 미래이다. 어린 소년은 초롱이에게 밥과 치킨을 같이 먹자고 노래했듯이, 삼순이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반려견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도 공유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반려견은 결국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자체이다. 우리의 친구이고 우리의 자식이다. 반려견이 우리를 곧 떠날 것 같다는 두려움과 슬픔에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삶에서 반려동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공유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희로애락을 공급받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지금 반려동물을 다른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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