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생태계
설날 풍경의 까치소리는 잠잠하지만
처마 끝에 매달린 잘 익은 곶감이
아직도 붉고 탐스럽다
어머니는 설날 밥상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하다
마당 귀퉁이에서 솥 불을 지펴
정을 더 갈아 넣으며 추어탕을 펄펄 끓이고
햇빛에 탁탁 튀는 뒷밭 참깨를 쥐어짜
참기름을 두르고
간지논에서 키운 붉은 마음을 돌돌 갈아
푸른나물을 무치고
자식 걱정 같은 비늘을 걷어내 맑은 조기를 찌고
눈앞에 떠나는 순간
다시 그리움이 시작되는 식혜를 삭힌다
강아지 시츄 자두는 자기도 정이 고픈지 종일 컹컹댄다
마음 깊은 집! 제목부터 애매하다. ‘마음 깊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 제목에서 이 표현만 몇 번이나 들여다봤지만 그런 집의 형상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마음 깊은 집’을 수식하는 ‘어머니 같은’을 붙여서 다시 들여다보았다. 큰 소득이 없다. 여전히 어떤 집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래서 구조를 다시 짜 맞추어 보았다. ‘어머니 같은 마음 깊은’이 ‘집’을 수식하는 것으로!
시간적 배경은 설날이다. 설날이지만 까치는 울지 않고 조용하다. 처마 끝에 매달린 곶감은 탐스러움을 진하게 발휘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설날을 맞이한 집의 풍경이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마음은 설 준비에 마음이 분주하다. 마음은 분주한데 몸은 한가로울까!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라면 ‘몸 따로 마음 따로’가 가능하다. 이원론에서 마음은 ‘이성, 합리, 논리, 언어’의 영역이라면 몸은 ‘행동’의 영역이다. 이성과 행동이 따로라는 것이 이원론의 핵심이다.
‘분주한 마음’은 ‘분주함 몸’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하나인 일원론은 아니다. 일원론에서는 마음이 곧 몸이고 몸이 곧 마음이라고 본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꼭 같은가? 우린 그렇지 않은 현상을 많이 경험한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렇다, 어쨌든 몸과 마음은 구분되긴 한다. 구분된다고 해서 그 경계가 엄격한 것은 아니고 느슨하다. 이 말은 몸이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마음이 몸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분주한 마음은 ‘마음속의 몸’ 철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속에 몸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몸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마음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고 몸에 기초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분주함은 마음이 아닌 몸의 특성이다. 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방식을 바탕으로 마음도 그렇게 움직이겠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이 분주한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의 몸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마당에서 불을 지펴 추어탕을 끓인다. 뒷밭 참깨를 쥐어짜 만든 참기름으로 직접 키운 채소로 나물을 무친다. 조기를 찌고 식혜를 삭힌다. 우리 어머니는 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을 하루 동안 다 해낸다. 얼마나 몸이 정신없이 바쁘겠는가? 이 일들은 중복되었을 것이다. 추어탕을 끓이는 중에 나물을 무치고, 조기를 찌는 동안 식혜를 삭혔을 것이다. 순차적인 직렬식이 아닌 중복되는 병렬식의 일 진행 방식이다. 그러니 몸이 12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는 하나의 몸으로 이 일들을 모두 깔끔하게 처리해 낸다.
몸이 이렇게나 바쁜데도 우리 어머니는 그냥 몸이 바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음도 분주하다. 여기서 마음의 분주함은 정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음식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마음을 담느라고 분주한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가스레인지에 추어탕을 끓일 수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솥 불을 지폈다. 그 불을 눈으로 보면서 그 솥 불에 어머니의 마음을 담았다. 추어탕에도 무어라고 말하지 못하고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정’이라는 마음을 더 갈아 넣었다. 조기를 찔 때는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비늘을 정성스럽게 걷어낸다. 설음식을 다 먹고 고향으로 떠날 자식들을 생각하니 ‘그리움’이라는 마음이 벌써 몰려온다. 미래의 그리움을 생각하며 어머니는 식혜를 삭히고 계신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식의 마음에 닿게 하려고 몸을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강아지 시츄 자두가 지켜본다. 그 모습에 자기도 정이 그리워 하루 종일 컹컹대고 있다. 시인은 우리 삶의 영역을 인간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동물에게까지 개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동물에게 이성을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몸이 있으므로 정은 논할 수 있다. 시인은 이 ‘정’의 측면에서 강아지라는 동물을 우리 삶에 포용하는 것이다.
‘어머니 같은 마음’이 깊이 있게 자리 잡은 이 집에는 어머니의 분주한 몸과 어머니의 정과 강아지의 정이 함께 사는 거대한 생태계이다. 이 생태계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지만 어머니는 이 생태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그냥 말없이 행동한다. 이런 어머니의 소박한 행동 자체가 이 생태계를 작동하게 하는 힘이다. 참으로 부드럽게 돌아가는 생태계를 볼 수 있어서 나 또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