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 늙어가는 모습에!
타다 말다
타다 말다
가을 왕겨가 쓸쓸히
타고 있다
남아 있는 삶이 얼마쯤 될까
한 뼘쯤 남은 해가 기울어 가고 있다
논두덩이는 늙은 손등처럼 부어가고
길은 좁아지고 있다
늙음조차 늙어가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 푸른 집앞 골목길이
색을 잃어가고 있다
느린 걸음걸이에서
시간이 점점 삭아가고 있다
남아있는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머니가 늙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들의 모습! 나는 그 아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난 다시 우리 어머니가 늙어 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난 우리 어머니가 늙어 가는 모습을 많이도 지켜봤지만 그 어떤 비유도 떠올리지 못했다.
시인은 어머니의 늙어 가는 모습을 가을 왕겨가 쓸쓸히 타고 있는 모습에 비유한다. 왕겨는 쌀겨라 부르며, 쉽게 말해 쌀 껍데기이다. 벼가 도정을 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과연 우리들 어머니는 이런 왕겨의 모습을 닮았다. 왕겨가 품었던 알갱이를 내놓듯이, 우리 어머니도 품었던 자식을 때가 되면 타향으로 보낸다. 왕겨와 쌀이 이제 분리되듯이, 어머니와 자식도 분리된다. 왕겨는 쌀을 배출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고 퇴비로 사용되거나 태워짐으로써 사라질 준비를 한다. 우리 어머니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 다른 세상으로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왕겨가 ‘타다 말다, 타다 말다’ 하듯이, 어머니는 늙어 가는 과정에서 무릎과 허리가 ‘아팠다, 괜찮았다’ 한다. 그렇게 산발적이고 불규칙적으로 타고 있는 왕겨 옆에는 아무것도 없듯이, 어머니도 자식들을 타향으로 떠나보내고 홀로이 쓸쓸하게 늙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쯤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 남은 것 같지는 않다! 시인은 어머니의 삶을 기울어 가고 있는 해가 한 뼘쯤 남은 것에 비유한다. 우리에게 흔히 일생은 하루이다. 하루는 새벽, 정오, 황혼, 일몰, 밤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태어나는 출생은 새벽이고, 성숙은 정오이고, 노년은 황혼이고, 죽음의 순간은 일몰이고, 죽음의 상태는 밤으로 이해된다. 친절한 우리 시인은 우리의 개념 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개념적 은유를 활용하여 해가 완전히 진 것이 아니라 한 뼘쯤 남은 것으로 어머니의 노년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의 늙은 손등을 논두덩이가 부어가는 것에 비유한다. 시인은 어릴 때 논두덩이를 밟고 거닐던 시절을 떠올려 그것을 어머니의 부은 손등에 비유한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추측해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시인은 인생을 나그넷길에 비유해서 어머니의 길을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의 길은 자식의 길과는 달리 좁아지면서 결국은 끝을 보이려고 한다.
시인은 어머니라는 늙음 자체가 늙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다. 어머니의 늙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드디어 시인은 자신의 주관성을 표현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가 다니셨던 그 골목길이 색을 잃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곱디고운 피부가 흐릿해지고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늙으신 어머니의 걸음걸이에 속도는 부재한다. 시간은 흐름이고 시간은 일정 속도로 흘러간다. 이런 속도가 어머니의 걸음걸이에서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이를 보니 어머니의 시간이 삭아가고 있는 것을 시인은 느낀다.
시인은 자신에게 묻는다. 어머니의 늙음 옆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늙음은 죽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남아있는 시간’이라는 말로 곧 죽음이 닥칠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니 시인은 더욱 자신이 무기력함을 느낀다. 자연 앞에서, 시간 앞에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시인은 무력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