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는 시인의 마음
늙은 호박은 큰 잎사귀로 가을 소나기를 홀짝거리며
제 몸집을 불리고
산비탈길에 뒤뚱대다 부뚜막 끝에 미끄러진다
그 속을 탁 자르면
자궁 같은 붉타래가 가마솥에 기어들어가 느엇느엇 타오른다
뒷밭은 늘 살아있는 것들이 푸덕푸덕 댄다
햇살에 참깨가 제 속을 뒤집어
파닥파닥 튀고
여우비는 살구나무에 몸을 헹구며
부끄러워하고
딸기는 흙살에 온 힘을 다해 몸 비비다
붉은 속울음을 울컥울컥 토한다
마당은 정보다 깊다
늙은 보리떼가 햇빛에 타닥타닥 타다
소 여물통에 기웃거리며 정을 붙이고
처마 끝에 매달린 오랜 메주는
범종 소리에 서걱대며 깊어가고
빨랫줄에 아가미를 쩍 벌린 젖은 명태는
긴 바람을 받아먹고 속을 익힌다
고향 여름밤은 마음이 울울대는 밤이다
굴밤나무 아래서 어둠을 베고 흰 모깃불 쫓아
첫별을 쫓고
늦달이 슬피우는 소리가 묵묵하고
풀울음이 새끼를 치는 소리가 먹먹하고
반딧불 따라 개 짖는 소리조차 적적하고
고향을 생각하면 시간이 치즈처럼 녹아 마음이 늙지 않는다
늙음은 몸의 속성이다. “몸이 늙어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이 옛날 같지 않다”고들 하지 않던가! 몸은 늙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몸은 자연법칙을 따른다. 태어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몸은 늙어 제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마음이 늙는다는 것은 뭘까? 마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 마음은 추상적 개념이므로 그 자체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몸의 힘을 빌어야 한다. 늙음의 개념은 몸의 속성이라고 했다. 몸이 늙을 때 나오는 성질을 생각해 보고, 그 성질을 마음의 늙음으로 투사해 보면 된다. 늙음의 우리말 뜻은 “한창때를 지나 쇠퇴하다”이다. 몸이 쇠퇴한다는 것은 유연성이 떨어지고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이다. 젊음에는 유연성과 활동성이 있지만, 늙음에는 뻣뻣함과 정지가 있다.
마음이 늙는다는 것은 사고가 정지되고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마음이 늙은 사람은 자기 생각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일 만큼 유연하지도 않다. 시인은 고향을 생각하면 마음이 늙지 않는다. 시인은 마음은 유연함과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고향에는 어떤 것이 있길래 시인의 마음은 늙지 않고 유연하고 활동적일까? 이제 우리 시인의 고향으로 가보자. 먼저, 시인의 고향에는 ‘늙은 호박’이 있다. 다 익어서 늙은 호박이지만 널찍한 큰 입으로 가을비를 마셔 젊은 사람처럼 근육을 단련해 몸집이 커진다. 유연하게도 산비탈 길에서 부뚜막까지 미끄러져 내려온다. 그 속을 잘라보니 늙음의 색깔이 아닌 생명의 색깔인 붉은색이다. 마침내 적극적으로 스스로 가마솥에 들어가 타오른다.
다음으로 뒷밭이 있다. ‘뒷방 늙은이’와 연상되는 뒷밭은 늙음을 품고 있다. 그 늙음 속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참깨가 햇살을 받아 파닥파닥 튀면서 움직임을 상징한다. 여우비는 아직 어려 부끄러운 듯이 내린다. 딸기는 흙살에 몸을 비비다 생명의 색깔인 붉음을 토해낸다.
시인의 고향에는 늙은 보리 떼가 있다. 늙은 보리 떼지만 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소 여물통에 기꺼이 들어간다. 오래된 메주도 있다. 오래된 늙은 메주이다. 늙은 메주는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깊이를 더해 간다. 빨랫줄에는 오래되어 굳어버린 늙은 명태가 있다. 늙은 명태도 늙은 메주처럼 바람을 맞으며 속을 깊이 익히고 있다. 모두 늙은 것이지만, 보리 떼도 메주도 명태도 무언가 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고향에는 여름밤이 있다. 그곳 여름은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밤이다. 우리에게 흔히 일생은 하루이다. 아침은 어림이고, 점심은 젊음이고, 밤은 늙음이다. 시인 고향의 여름밤은 결국 ‘늙은 여름’이다. 늙은 여름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어둠을 과감히 베고, 모깃불과 첫 별을 쫓는 동작을 한다. 늦달의 소리와 풀울음의 소리와 반딧불을 따라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늙은 여름밤에 들리는 소리는 운치를 더해준다.
시인의 고향에 있는 것들은 모두 늙었다. 하지만 그 늙은 것은 가만히 있질 않고 각자의 활동을 하면서 움직임을 보인다. 그 늙음은 유연성과 활동성을 품고 있다. 이런 성질을 가진 시인의 고향은 그대로 시인의 마음으로 투사된다. 이제 시인은 몸은 늙었을지언정 마음은 늙지 않았다.
이 시의 해석에는 두 가지 투사가 작용한다. 하나는 몸에서 마음으로의 투사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의 고향에서 시인의 마음으로의 투사이다. 투사란 의지하는 것이다. 투사란 상대에게 힘을 빌려 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몸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에 의지해서 명확성을 확보한다. 뻣뻣하고 움직임이 없는 시인의 늙은 마음은 활동적인 자기 고향에 의지해서 활동성과 유연함을 확보한다. 나 또한 내 몸과 마음을 유연하고 활동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