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폼을 완성하는 거야. 끊임없이 계속 가다듬는 거지.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알겠니? 탁구에서 졌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폼이 나의 폼보다 그 순간 더 완성되었다는 뜻이야. 자, 스매시에 있어 너의 폼이 생긴 게 언제였지? 일주일 전이요. 그럼 일주일간 가다듬은 폼이 그물을 넘어오는 거야. 그것을 내가 리시브한다면...... 좋아, 쉽게 삼십 년 탁구를 쳤다 치자. 그럼 다시 말해 내가 삼십 년간 가다듬은 폼이 널 리시브하는 거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 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그건 이동이야. 공간과 차원의 이동. 즉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었던 거야. 그게 탁구의 정체야. 저 편의 완성된 폼을 리시브하면서, 또 스매시하면서 이쪽의 폼을 완성해갈 수 있는 거니까.”
박민규의 소설 『핑퐁』 중 한 구절이다. 특히 다음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 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어떤 문장은 계속해서 마음을 떠다니다 어느 날 불현듯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다르게 보이게 한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 고수님과 3구 연습을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라고? 그럼 나는 어떤 폼을, 어떤 자세를 상대에게 보내고 있는 거지? 상대 고수님은 내게 어떤 폼과 자세를 보내고 있는 걸까 ? 이런 생각이 들자 네트 위를 오가는 공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네트 위로 폼이 오가고 자세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고수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탁구대를 제외한 3대의 탁구대에서도 각자의 폼과 자세가 오가고 있었다.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 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라는 말을 내게 대입해 보았다. 내 앞에 있는 고수님은 8년의 폼을 가졌고 나는 5년의 폼을 가졌다. 8년을 가다듬은 폼이 날 리시브하면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5년의 폼에서 8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린다고 한다. 작가는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 탁구의 정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생각해 보았다. 8년을 가다듬은 그의 폼이 날 리시브하면 공은 순식간에 5년의 폼에서 8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한다. 8년의 폼이 5년의 폼에 전이된다. 옆 탁구대를 보니 10년을 가다듬은 폼이 3년의 폼을 리시브하고 있다. 저 공도 10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하려나? 10년의 폼이 3년의 폼에 전이되고 있으려나? 뒤쪽 두 대의 탁구대도 마찬가지다. 6년의 폼이 1년도 안 된 초보자의 폼에 전이되고 있으며 7년의 폼이 4년의 폼에 전이되고 있다.
네 대의 탁구대에서는 각자의 폼과 자세가 오가고 있다. 또한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고 있다. 탁구 치는 내가 다르게 감각된다. 덩달아 주변 사람들도 다르게 보인다. 그저 공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폼과 자세가 네트 위를 오가는 탁구장.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고 있는 탁구장. 탁구장 문을 열면 이런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냥 탁구만 치는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