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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30. 2022

한쪽 성을 가진 의사

“저는 여자 선생님을 원해요.”


어떤 사람은 의사의 성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여자 의사가 남자 의사보다 더 친절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믿음, 이전 남자 치료자가 별로였던 경험, 같은 성을 가진 의사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편해서 등등.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지 않으면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입고 벗을 수 없는 정체성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여성이라는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여성으로서 의사,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늘 의식하며 지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의사가 되기 전까지 제가 저의 성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지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춘기 이전까지 저는 제가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여자였고 남자애를 좋아해 본 적도 있지만 말이죠. 초경을 일찍 시작한 아이들이 2차 성징을 드러낼 때 저는 길이 성장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짧은 머리 때문에 남자아이처럼 보였죠. 그러다 남들보다 늦게 초경을 했을 때 약간의 상실감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확실하게 여성이 되었고 남학생과 분리된 학교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한쪽 성만 모여있던 곳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성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을 만나면 제가 이제까지 세상을 잘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여성이어서 누릴 수 있는 장점도 많았기 때문에 남자 친구들이 부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단 안에서는 남자 동료들이 부러웠고 여성은 두 번째 성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당시 몇몇 진료과를 제외한 나머지 의국은 남초 집단이었습니다. 정신과 여자 선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었고 모임에서 만난 여자 선배는 다른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호걸이었습니다. 저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어깨를 접고 있어야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치료자가 되면서 저의 성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여자 전공의인 제게 기대하던 역할이 있었는데 바로 병동의 어머니 역할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그 역할을 잘하고 싶었습니다.

병동의 어머니 역할은 환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보호자, 병동 직원, 의국 등 병동 안팎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었죠.


치료자는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료, 상담사, 코치, 또는 보호자 역할이 있고 이는 질환의 종류, 병의 경과나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예를 들어, 위기 개입이 필요한 입원 환경에서는 치료자가 조금 더 보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됩니다. 치료자가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경우에는 입원 형태나 기간, 치료 방법의 선택 과정에서 다른 경우보다 치료자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됩니다.


보호자 중에서도 왜 하필 어머니인가, 여자는 꼭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이 꼭 나뉘어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의 역할을 말할 때 자신보다 타인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미덕을 앞세워 희생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어머니는 이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따스함, 수용, 연대, 비폭력적인 자기주장과 같은 소프트 파워 말입니다. 제가 연상하는 어머니는 경직된 공간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숨결 같은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역할을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 역할이 필요할 때 엉뚱하게 엄격함과 권위를 앞세웠고 또는 그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더 많은 환자분과 만나고 경험을 쌓을수록 저는 한쪽 성에 구애받지 않고 두 개의 성을 편하게 넘나 들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느꼈던 것과 정반대로 여자 의사이기 때문에 일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단 둘이 놀이 치료실에 들어갈 때 제가 무서워서 쭈뼛거리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엄마에게 하듯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서 저와 함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상대방이 안전하다 느끼고 경계 태세를 낮출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돌봄을 제공하는 주체로 아주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관계 안에서 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순간에는 제가 엄마가 되고 아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또 변하겠지요. 미래의 제가 저에 성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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