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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30. 2022

인생은 한 편의 시

깊은 밤, 응급실 안은 대낮처럼 환하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입니다.

침상 옆에서 진료를 마친 당직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입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의 진료기록을 작성합니다.

내과 당직의가 침상과 모니터를 예닐곱 번 오가는 동안 정신과 당직의는 모니터 앞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습니다. 내과 당직의가 그쪽을 힐끗 쳐다봅니다. 깜빡이는 커서가 위치한 곳.

‘유년 시절’

이제 유년 시절의 기록이라면 아침이 밝을 때까지 그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지…….

 

정신과 진료기록은 조금 특별합니다. 이야기가 담겨있거든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극히 일부분만이 그곳에 담겨있지만, 그 또한 삶의 조각이기 때문에 서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린을 이어 그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마치 소설처럼요.

소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 로빈의 진단명이 마음속에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직업병일 수도 있지만 문단 서두에 로빈의 아버지가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증상에 꼭 들어맞는 진단명을 말해 보겠는가? 대체 어떤 장애가 로빈을 설명할 수 있는지.”

 

한 개인의 진솔하고 생생한 삶의 서사가 진단 분류체계 알고리즘을 거쳐 네모난 진단명으로 출력되는 것은 분명 시적이지 않습니다.

로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단명을 붙이려 애쓰는 소아과 의사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뭇사람에게서 진단명을 찾는 강박증을 가리키는 정신병은 없는지 궁금해합니다.

이 장면에서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애가 느린 거지 자폐는 아니라고 했어요.”

 

정신과 의사는 ‘묵직한’ 진단명을 전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안다고 쉬운 일은 아니죠.

‘신탁을 전달하는 여사제(Pythia)처럼 모호한 말로 얼버무릴 수 있다면…….’

‘현대 의학이 점지해 준 진단이라고 과학의 권위에 숨어버리면, 좀 더 쉬울까?’

이 불편한 과정을 피하는 방법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큰 병원을 권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학병원에 오기까지 각기 다른 진단을 듣기도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진단하는 사람의 역량 차이일까요? 의학의 부정확성 때문일까요?

고혈압과 당뇨처럼 한 개 이상의 질환을 앓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혈압과 당뇨처럼 공진단을 받기 쉬운 질환에는 불안과 우울증, 틱과 ADHD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습니다. 특히 발달과정의 문제라면 여러 가지 질환이 공존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심지어 어떤 병들은 순차적으로 일어나 행진(march)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병원에 방문하는 그 시점에 두드러지는 질환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다른 진단명은 덜 언급되기도 합니다.

또한 21번 염색체의 세염색체증(trisomy)과 같은 유전자 질환이 아니라면 진단이 변하기도 합니다. 병원에 오가는 중에도 시곗바늘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아이가 가진 증상이 변하고 주변 상황이 변합니다. 발달이 느렸던 아이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익히고 성장했지만, 또래 아이들의 발달 수준과 비교했을 때 그 간극이 더 벌어지기도 합니다. 발달 지표의 경계선에 있던 아이가 최종적으로 방문한 대학병원에서는 자폐스펙트럼장애로 진단받을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로빈의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로빈은 로빈이지 진단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단의 짝꿍은 치료입니다. 진단은 최선의 치료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진단 후에는 증상과 기능 개선을 위한 치료, 교육과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합병증 예방을 위한 전략을 짭니다. 전문가들은 진단명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된 의료자원을 진단을 받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의사 입장에서 본 진단명의 의미겠죠.

 

병원 밖에서 만나는 선생님, 또래 아이들, 다른 어른들은 발달장애를 진단받은 로빈을 어떻게 대할까요?

사회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가 로빈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진단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자폐스펙트럼장애는 무지개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무지개를 두 가지 색깔로 보는 곳에서는 딱 그만큼의 틀 안에서 로빈을 바라보게 됩니다.

‘남들과 다른’ 아이들이 비범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믿음도 무지개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부모와 아이 모두 무언가를 찾다 지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특출함이 없어진다면, ‘다름’만 남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꼭 자폐라고 말해야 할까요, 남들보다 느린 아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묵직한 진단명을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좋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수용적이고 열린 자세로 그리고 겸손한 태도로 조금 더 나은 것을 찾아 나갈 뿐입니다. 진단명이 그 사람과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헤아리려 애써야 합니다.

 

소설로 다시 돌아가 아버지는 로빈을 무어라 설명할까요?

 

“나의 슬프고 특별하며 갓 아홉 살이 된, 이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아이.

내 아들은 내가 헤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주머니 우주였다.”

 

한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하나의 소우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우주를 탐험하려면 관심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로빈의 아버지는 로빈이 집중할 때 하는 행동과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부산한 행동이지만요. 로빈이 뜬금없이 어떤 말을 내뱉을 때 아버지는 아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속에 숨겨진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조차 로빈을 다 헤아릴 순 없었지요. 인생이 한 편의 시라면 누군가에게는 쉽게 읽히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물음표로 남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잘 안다는 것은 그가 하는 몸짓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자간의 소통을 타인과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이 주는 슬픔이지요.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슬프고 특별한’ 로빈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진료기록이 이렇게 서사적으로 표현된다면, 더 잘 알게 될까요. 정신과 기록은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담겨 있죠. 하지만 결국 알고리즘을 따라가 하나의 네모로 출력되는 것은 과학의 속성입니다. 그 사이의 수많은 도형, 작은 우주를 간과하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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