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451
늦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갔다. 코너를 돌면 보이는 긴 복도 끝, 소파에 지오가 앉아있었다. 건물 안이었지만 2월이라 추웠다. 도서관 문을 열고 온풍기를 틀었다. 지오는 조용히 들어와 늘 앉던 자리에 책가방을 두고 서가를 한 바퀴 돌아보곤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사서인 내가 도서관 문을 여는 시간은 9시 30분이다. 그런데 지오는 9시 전에 오는 것 같았다. 먼저 와서 문 앞에서 기다리다 문을 닫는 12시 30분까지 있는다. 학기 중엔 지오를 도서관에서 만난 적이 없다.
지난 여름방학 사서로 가는 날마다 지오를 만났다. 책을 빌리는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곤충 책도 있구나. 처음 보네~ 재밌어?" 지오는 곤충을 좋아해서 학교에 있는 곤충책은 다 보았다고. 집에선 사슴벌레를 키운다고 했다. 나도 초등학생 때 사슴벌레를 키우며 수박을 주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책으로 말문을 트면서 우리는 조금씩 얼굴을 익혔다. 지오는 내가 가는 날이면 400번 서가 책 정리를 도와주었다. 정리를 마치고 함께 문단속을 한 뒤 교문 앞에서 헤어졌다. 점심은 어떻게 먹는지 이제 어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다음 주에도 도서관에서 보자"라고만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늦된 아이 걱정에 시작한 학부모 사서봉사였다. 잠깐이라도 내 아이 곁에 있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10년이 넘었다. 나는 오늘도 연차를 내고 첫째와 둘째가 졸업한 초등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간다.
나는 왜 도서관으로 가는 걸까. 왜 책을 읽을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진 않는다. 책이 대출이자를 갚아 주거나 일을 대신해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책을 읽고 나면 밀린 청소와 설거지... 회사로 보내야 할 기한 있는 작업물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일을 할 시간마저 책이 가져가버린다. 내게 책 읽기는 시간을 쪼개는 일이자 잠과의 사투다.
책이 삶에서 힘을 가지려면 파버의 말처럼 세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책은 있는 그대로의 추하고 생생한 삶을 담고 있어야 하고 독자는 그것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듯 읽어야 하며, 그렇게 소화한 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여유가 없다. 이른 아침 보충수업 가는 첫째의 도시락 준비를 시작으로 종일 팀원과 부대끼며 업무를 보고 마감한다. 힘들고 바빴으니. 오늘 저녁만큼은 즐거워야 한다. 넷플릭스를 보고 침대에 누워 쇼츠를 연달아 넘긴다.
책을 본다고 방학 내내, 긴 시간 혼자 보내는 아이를 위한 해답을 찾을 순 없다. 입시를 위한 수업과 과제로 바쁜 첫째와 둘째를 위한 길도 못 찾는다. 무력한 어른인 나를 자각하게만 한다. 괜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자책과 괴로움을 주는 책은 보지 말고 태워 버리자. 비티서장처럼. 화씨 451도로 책의 한 장 한 장을 불태우자. 불은 책임과 결과를 없애버린다. 견디기 힘든 것은 화로로 던져 버리자.
클라리세처럼 비를 맞고, 민들레가 피고 지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진정한 관계를 원하면 상처받고 아플 수 있다. 그보단 설렘만 주는 관계가 어떨까? 책임감을 갖거나 감추고 싶은 허물은 드러낼 필요 없다. 보여주고 싶은 내 일상, 기쁨, 슬픔, 좌절을 적절히 편집해서 전시할 수 있다. SNS에.
나 역시 불편한 진실과 무거운 관계는 피하고 싶다. 클라리세와 파버처럼 누군가를 깨우치게 하기엔 관계에 대한 진심과 삶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다. 몬태그처럼 온 삶을 바쳐서 고뇌할 여력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읽는다. 그저 재밌어서. 도서관에 찾아오는 아이들과《오므라이스 잼잼》을 읽고 급식 메뉴에 대해 이야기한다. 낡아진 책을 테이핑 하며 서가의 책 냄새를 맡는 일이 좋다. 종종 지오와 곤충 그림을 보는 일이 기쁘다. 잠깐이어도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서로 안심과 안녕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긴다.
몬태그처럼 치열하지 않아도 나름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비티처럼 책을 애증 하며 자멸하지 않고, 밀드레드처럼 현실에 눈과 귀를 닫는 삶은 적어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꼭 책이 아니어도.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모자란 스스로를 인정하고 서로 손잡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삶의 아픔을,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길지 모른다.
400번 서가의 책을 정리할 때마다 지오가 생각난다.
_ 이월, 학교 안 도서관에서
*지오는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