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숨이 차도록 한 지 적어도 2년은 넘은 거 같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굳은 마음을 먹고 내가 하는 거라곤 체계적인 근력운동도 아니고 땀이 나도록 뛰는 것도 아닌 그저 열심히 걷는 것이었다. 그나마 열심히라도 걸었다면 운동이 되었겠지만 기분이 좋고 체력이 남은 날엔 하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서 쉬고 싶은 날에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지와 쉬고 싶은 욕구의 대결이 펼쳐지는데 이 대결은 헤비급과 슈퍼 경량급의 복싱 경기와도 같이 대결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다.
쉬고 싶은 날에는 운동 의지 자체가 생기지 않았고, 의지 자체가 없으니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규칙적인 생활(3주기 교대근무)과 운동부족 그리고 간헐적 폭식은 고장 나기 시작한 나의 몸을 더 빠르게 망가지게 했고 결국 술이라곤 첫 회식 때 소주 3잔 마시고 4번을 토할 정도로 알콜과는 거리가 먼 나를 지방간염의 세계로 인도했다. 건강검진 결과 간수치가 정상수치의 마지노선보다 5배가 높았다. 유난히 평소에도 피곤함을 지나치게 느끼던 나는
'모두들 이렇게 힘든데 잘 버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들 저렇게 힘든데도 드러내지 않고 맡은 업무를 다 해나가는데 나는 정말 나약한 존재였구나'라며 나의 나약한 모습을 비난했다.
건강검진 후 의사 선생님과 상담시간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평소에 많이 피곤하시죠? 컨디션도 잘 안 돌아오시고"
"네.. 그렇죠..."
"운동하시고 지금부터 6킬로는 더 빼셔야 돼요. 살 빼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네.."
"그리고 술은 당연히 끊으시고요."
"술은 원래 안 마십니다. 하하."
"비알코올성은 더 위험합니다. 알콜성은 끊으면 개선의 여지가 있지만 비알콜성은 살 빼고, 식습관 개선하고 할 수 있는 건 다해야 됩니다. 간이 안 좋아지면 당뇨가 올 수도 있고..."
"네.."
"약 처방해드릴 테니 꾸준히 드세요."
"아 근데.. 커피는 마셔도 상관없나요?"
"커피는 상관없을 거 같네요."
"아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_^."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커피 안에 있는 카페인 때문인지 난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셨다.
원래는 '얼죽아'였지만 요즘은 여름엔 '아.아' 겨울엔 '뜨.아' 를 선호한다. 점점 한겨울에 찬 컨피를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여름엔 조용히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았고, 겨울엔 책상에 조용히 앉아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갔고, 역시나 그동안 내가 한 것이라곤 집에 설치되어 있는 철봉에서 턱걸이를 갓 잡은 멸치처럼 파닥파닥대며 10개에서 15개 정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잠깐 부푼 팔뚝과 어깨를 보며 이 정도면 30대 후반 몸치고는 괜찮은 거 아냐? 하며, 훅훅 대면서 거실로 나와 하루 운동 다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운동이란 임계치를 넘겨야 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임계치 근처에만 갔다가 더하면 큰일이라도 날 사람처럼 돌아와 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의사선생님의 경고와는 다르게 오히려 3킬로가 늘어났다.
어느 날 거실에 누워 TV를 보다가 용암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배를 발견하고는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방송이었는지 광고였는지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득 어떤 대사가 떠올랐다.
"오빠 나 살 좀 빼야겠지?"
"아니 빼지 마. 난 네가 1g이라도 사라지는 게 싫어."
이런 식의 대화였던 거 같다.
혼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아내에게
"당신도 내가 1g이라도 사라지는 게 싫어?"
라고 물어보았다
"지금 당장 사라져서 운동이나 좀 해."
"큼.. 그래.."
괜한 말을 꺼내서 호빗처럼 뜻밖의 운동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갔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는 이불과 상체를 공유하고 소파와 다리를 공유하고 있던 나를 이 험난한 한가을 야생의 밖에서는 버티지 못할 몸으로 만들었다. 지구와 달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커피집이 나를 내가 커피집을 서로 끌어당겼고 나는 자연스럽게 커피집 문을 밀고 있었다. 카페의 커피향은 나를 포근한 엄마의 품처럼 안아주었다.
요즘 대형 커피 체인점은 키오스크가 대부분 설치되어있는데, 난 그게 불편했다. 불편함을 넘어 조금 거부감이 든다. 이유인즉 키오스크로 결제를 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지령(?)을 받으면 당황하게 되고, 뒤에서 누군가가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면 갑자기 심하게 초조해진다. 고등학생 때 같은 반 친구가 뒤에 누가 서있으면 소변을 보기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초조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난 키오스크의 지령을 한번에 이해 못 하고 두리번두리번 대다가 결국 임무를 포기하고 뒷사람에게 차례를 내어주곤 했다. 그래서 키오스크가 설치되어있는 곳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자주 가는 카페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카페에서 파는 빵을 시켜먹은 적이 있는데 빵에서 딱딱한 이물질이 나왔고 난 그것을 씹은 적이 있었다. 배가 얼마나 고팠었는지 이물질을 아주 다부지게 씹어버렸다. 그래서 그 딱딱한 것이 나의 입에서 완전 가루가 되어 나왔고, 난 사장님에게 이런 것이 나왔으니 다른 손님들이 씹지 않게 조심 좀 해달라고 말하고는 자리로 갔다. 잠시 후 사장님과 직원이 나를 찾아와 계속 사과를 하셨고, 치아에 문제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잠시 후 사장님은 어떤 카드를 나에게 내미셨는데 10만 원 상당의 카페 이용권이었다. 난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거냐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그 후로 10만 원을 다 쓰고도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아무튼 그런 특별(?)한 인연으로 그분들은 나의 주문을 반갑게 웃으시면서 직접 받아주신다.
대형 커피 체인점이긴 했지만 오전에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항상 나만의 지정석(내가 멋대로 정한)에 앉을 수 있었다. 대개 지정석이란 가게 맨 끝 구석진 곳이다. 구석에 박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날은 운동한다고 나와서 준비물이 없었다. 다행히 이어폰은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요즘 관심이 부쩍 생긴 브런치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었다. 동영상을 보다가 잠시 볼 일이 생겨 화장실로 가는 중간에 가게에서 마련해놓은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가 즐겨 읽었던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 있었다.
난 빨강머리 앤을 참 좋아했다. 계기는 어렸을 때 봤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으로 시작하는 만화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그 추억을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고 있었다. 내가 10대 후반 정도쯤 되어 인터넷이 활성화된 세상이 되었을 때 나는 빨강머리 앤 관련된 여러 가지를 찾아보았고, 배경장소가 캐나다의 프린스 애드워드 아일랜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프린스 애드워드 아일랜드에 가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평생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그곳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건 신혼여행 때였다. 난 결혼하기 전 아내에게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얘기 한 적 이 있었고, 아내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신혼여행을 거기로 가는 건 어떠냐고 나에게 물어왔던 것이다. 난 아내의 그 말에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 애초에 나처럼 연고(?)도 없던 그녀였기에 신혼여행만큼은 그래도 원하던 곳이 있었을 텐데 나의 오래전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었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아내는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잘 없고, 나의 기호를 존중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유일하게 나를 닦달할 때가 있었는데 운동과는 담을 쌓고 매일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깨작 운동을 하고 난 후 혼자 뿌듯해하는 나를 볼 때였다.
"나가서 좀 뛰어.", "그걸 운동이라고 한 거냐?", "너 일찍 죽고 싶어?", "그래 그냥 그렇게 살아라 오빠 몸 오빠가 알어서 하는 거야. 다 큰 성인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지친다."
등등의 말들을 가끔씩 쇼미 더 머니의 모든 출연자들이 일시에 속사포 랩을 쏟아내듯 불을 뿜으며 토해낼 때가 있었다.
귓속에 아내의 랩이 맴도는 듯했다.
잠깐 신혼여행 때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우린 캐나다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고 밴쿠버, 토론토를 거쳐 마지막을 프린스 애드워드 섬에서 마무리했다. 밴쿠버, 토론토에서의 날들도 낯선 도시의 낮과 해질녘을 거닐며 이곳 저것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겐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일정지인 그곳에 갈 날을 내심 더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밴쿠버와 토론토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고, 그때를 돌아보면 프린스 애드워드 섬에서 보냈던 시간보다 훨씬 더 임팩트가 큰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은은한 기억을 오래도록 기분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건 역시 그 섬이었다.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쯤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돌아오면서 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혼자서 화장실로 떠났던 그곳을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녀(책)와 빨짱을 낀 채였다. 오랜만에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어나갔다.
한참을 읽다 보니 만화 빨강머리 앤이 보고 싶어 졌다.
애니메이션이 극장판으로 만들어진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같은 내용과 같은 그림체긴 했는데 어렸을 적 봤던 것과 이질감이 들었던 건 목소리의 차이였다. 요즘 버전의 앤은 일관되고 착한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할 때에도 주변을 신경 쓰는 느낌이라면 예전 앤은 앙칼진 느낌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혼자만의 세상에 완전히 빠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예전의 앤이 좀 더 앤답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앤은 마치 다른 사람이 진짜 앤을 흉내 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예전의 앤이 그리워져서 그때의 앤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오랜만의 혼자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던 나에게
'왜 너는 하라는 운동은 하지 않고 혼자 카페에 앉아 혼자 호사를 부리냐'고 책이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 놀았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냐며 말이다.
잠깐 집 앞으로의 여행 후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즐거워 지기 위해서 나의 여행이 아내에게 거짓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속죄로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카페를 나섰다. 오늘은 아이를 일찍 재우고 아내에게 '빨강머리 앤 한편 같이 볼까?오늘 갑자기 우리 신혼여행 때가 생각났어. 갑자기 향수병 걸린 사람 처럼 그리워지더라' 라고 말해야지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해야지.
'운동하러 나갔는데 너무 즐거웠어. 최근에 가장 땀을 많이 흘린 날이란 생각이 드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집으로 돌아는 길인 거 같다. 항상 배려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