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적하고 깨끗한 화분 받침대에 물을 받아 놨더니 벌이 수시로 와서 물을 마셨다. 아니, 이제는 ‘벌들’이라고 해야겠지. 벌집의 방은 조금씩 늘어났고, 벌들도 늘어났다. 하나가 와서 물을 마시고 가면 다른 하나가, 그 하나가 가면 또 다른 하나가 와서 물을 마셨다. 자기도 마셔야 할 거고, 애벌레들도 줘야 할 거고, 어쩌면 집 확장 공사할 반죽을 개는 데 보태 쓰는지도 몰랐다. 멀리서는 벌들이 벌집에 앉아 엄청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쌍살벌이 순하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어서 옥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유리 벽을 통해서만 지켜봤는데, 나중에는 용감하게 밖에 나가서 봤다. 걱정한 게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얘네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아주 이르거나 늦은 시간대, 그리고 흐린 날에는 온종일도 자는지 가만히 있어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도 있었다.
벌을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쌍살벌더러 말벌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쌍살벌은 말벌보다 얼굴이 작고 허리가 잘록하며 호리호리한 느낌이다. 벌계의 모델쯤 되려나. 집 모양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쌍살벌의 집에는 외피가 없고 방 구조가 훤히 보여서 관찰하기 좋다. 아주 가끔 벌들이 자리를 좀 비켜주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얼핏 보이기도 한다.
벌이 나타났다고 경보를 울려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쌍살벌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기 바빴다. 동생은 “쌍살벌? 이름부터 불길한데.” 했다. 하지만 쌍살벌의 ‘살’은 죽일 ‘살’이 아니라 창살, 화살 할 때 ‘살’이다. 날 때 맨 뒷다리 둘을 축 늘어뜨리고 나는 모습이 옆구리에 창살을 끼고 다니는 것 같아서 붙은 이름이란다.
얘네가 우리 집에 집을 지은 것이 유별난 현상은 아닌 것 같았다. 쌍살벌은 도시에서도 잘 보인다고 한다. 특히 건물 외벽이나 처마 같은 곳에 집을 짓는 경우가 많단다. 역시 우리 집 그 장소가 조건에 딱 맞았던 거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도 거기 지어 놨고, 이번에도 거기 짓는 거 보면, 누가 오든 다음 벌도 또 거기다 지을 것 같다. 보는 눈은 다 똑같다.
맨 처음에 터를 잡고 집을 짓기 시작해서 신고해야 하나 망설이게 했던 그 분이 여왕님이였다. 특이하게도 쌍살벌은 일벌이 태어난 후에도 여왕벌이 계속 일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벌들도 그랬다. 일벌이 저렇게 늘었는데도 누가 일벌이고 누가 여왕벌인지 구별이 안 됐다. 다 똑같이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꿀벌 여왕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이 여왕을 보니 영 낯설었다. 여왕벌이면 일벌들이 먹여주고 단장해주고 다 해줄 줄 알았는데. 쌍살벌은 좀 멋있네.
여왕벌과 일벌이 함께 하는 일은 집 확장 공사와 애벌레 키우기다. 벌들이 워낙 바글바글 방 입구를 가리고 있어서 내가 관찰하는 위치에서 알이나 애벌레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방이 늘어나는 건 확실히 보였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면 입구를 하얗게 막아주는 것도 보였고. 집을 뭘로 만드나 했는데, 나무껍질을 갉아서 꼭꼭 씹어서 자기 타액과 섞어 짓는다고 한다. 꼭 한지 만들기 과정 같다. 한 마디로 얘네는 종이집을 짓는다는 거네! 쌍살벌을 영어로 paper wasp라고 부르는 건 그래서인가 보다.
쌍살벌은 주로 나비나 나방 애벌레를 잡아 잘게 씹어 경단을 빚어 애벌레에게 먹인다. 그런데 어른 벌은 다른 곤충의 애벌레도 먹지만 꿀이나 과일즙같이 달달한 물을 잘 먹는다고 해서 신기했다. 그 달달한 물에는 쌍살벌의 애벌레가 만든 넥타도 포함된다. 어른 벌이 고기 경단을 먹여주면 애벌레는 이거 먹고 힘내서 먹이 좀 많이 갖다 달라는 뜻인지 넥타를 내주기도 한단다.
단물을 좋아하면 물 받아 줄 때 설탕을 좀 타서 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물을 길어다가 어디 어디에 쓰는지 모를 땐 그냥 기본인 신선한 맹물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길 잘한 것 같다. 물을 길어다 쓰는 용도 중에 하나를 추가로 알아냈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될 무렵이면 한여름이라 어른 쌍살벌들이 입에 물을 물고 와 집 둘레에 뿌리고 양 날개로 부채질을 해 열기를 식혀준다고 한다. 그런 용도라면 끈적이는 물보다는 깔끔한 물을 추천하고 싶다.
날이 점점 더 더워져서 물을 자주 갈아줬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열기를 좀 흡수해줄까 싶었는데, 나무들도 힘든지 잎이 타들어 갔다. 날이 그렇게 더우니 시원한 물을 내도 금방 따뜻한 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될 때는 물을 자주 교체해주었고, 집을 오래 비울 때는 물그릇에 얼음을 몇 개 띄워서 내놓기도 했다.
쌍살벌이 화분 받침 테두리에 앉아 몸을 기울여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밖에서 겪었던 갈등, 속 시끄러운 고민이 벌을 보고 있는 동안은 별거 아닌 것처럼, 그저 사소하게 지나가는 것들처럼 느껴진다.
벌이 그 작은 입으로 물을 할짝거리면 아주 미세하게 물결이 찰랑인다. 물을 마시는 동안 배가 들썩이는 것도 보인다. 점점 주변 소리가 멀리 들리고, 시간의 흐름은 느려진다. 저렇게 작은데도 살아 움직이는 게 새삼 신기했다. 살아있는 게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건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우리 집에 왕 큰 벌집이 생겼다고 자랑했더니 친구는 왜 무섭게 집에 벌이 있느냐고 했다. 나도 처음에 무서워했으니까 할 말은 없다. 어디 무서워하기만 했나, 아주 적극적으로 제거할 생각이었다. 평화 협정을 체결할 때도 시원하게 “아 거 내가 오해했수다! 잘 지내봅시다!” 한 게 아니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이 선 넘기만 해봐. 그날로 전쟁이다.”였지. 결국 그건 무지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알지 못하니까,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위험 요소 이상으로 해석할 수 없으니까, 그저 두렵고 이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상을 첫눈에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분명 있다. 내가 연두색 손을 흔드는 금귤 새싹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듯이.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사랑에만 빠질 수 있다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치고 넘어가게 될까. 오래 지켜보고, 알아가고, 익숙해지고, 서로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의 사랑도 내게는 필요했다.
나는 쌍살벌에게 익숙해져 갔다. 아마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쌍살벌은 개체마다 다른 얼굴 모습을 인지할 수도 있고, 경험하지 않고 아는 능력인 추론 능력도 있는 동물이란다. 그러니 내가 물을 길어다 주는 허수아비라는 것도 알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자기네를 해코지하지 않고 근방을 왔다 갔다만 하는 동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어릴 적 벌에 쏘였던 건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쌍방의 오해였고 사고였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지레 겁먹고 쌍살벌 집을 파괴했으면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조금 덜 느끼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위험의 소지를 아주 조금도 남겨두기 싫다는 이유로 그 경이로움을 저평가하고 삶에서 누락시킬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어떤 위험은 상상했던 것보다 그렇게 무섭지 않고, 심지어 기꺼이 감수할만한 것 같다.
쌍살벌이 날아다니는 정원에 완전히 익숙해진 후에는 걔네가 날아다니든 말든 그냥 내 할 일 하러 돌아다녔다. 나무에 물도 주고, 벌 물도 갈아주고, 바닥도 쓸고. 그런데 그렇게 다니다 보면 가끔 쌍살벌의 활공 루트에 끼어들 때가 있다. 충돌사고가 발생할 뻔할 때면 나 혼자만 깜짝 놀라서 물러나는 게 아니다. 벌도 같이 깜짝 놀라서 비행 루트를 튼다. “어이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벌은 굳이 다른 데로 빠져서 반 바퀴 빙 돌고 다시 돌아와 물그릇에 착지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물을 마신다. 서로 그러는 꼴이 웃겨서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