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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쌍살벌이 떠난 자리

여름이 유독 더워 걱정했는데 다행히 쌍살벌들은 잘 살아남아 가을까지 보냈다. 그냥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다. 그동안 방을 점점 늘리더니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를 불안하게 했던 빈 벌집 보다도 훨씬 큰 집을 지었다. 일벌도 부쩍 늘어났다. 도대체 벌집을 어떻게 고정했길래 거주민이 저렇게 늘어나도 멀쩡하지?


저 많은 벌 중에 맨 처음 우리 집에 안착했던 여왕벌이 남아있는지도 궁금했다. 보통 처음에 벌집을 지은 여왕은 가을쯤 죽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여왕벌이 죽어도 벌집은 유지된다. 남은 암벌들이 계속 집을 증축하고, 애벌레들을 돌본다. 거기다 일벌도 알을 낳을 수 있다. 벌의 유정란은 암컷, 무정란은 수컷으로 태어난다. 그러니까 여왕벌이 기존에 낳았던 알은 딸인 일벌로, 여왕이 죽고 일벌들이 낳은 알은 수벌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딸들 중에 수벌과 짝짓기를 한 벌은 여왕벌로 독립해 겨울을 난다.


우리 정원에서도 벌집의 시간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 숨이 다해 옥상 바닥에 쓰러진 벌들이 점점 늘어났다. 짝짓기가 끝난 수벌들, 그리고 여왕벌이 되지 못한 일벌들이었다. 어쩌면 그중에 맨 처음 마주친 여왕벌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구분해낼 수 없었다. 정원은 내니 맥피 같다. 원치 않을 때는 멋대로 들이닥치고, 좋아지면 갑자기 이별이다.


겨울이 되고 벌들이 완전히 다 떠나 텅 빈 집만 남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미뤄왔던 벌집 제거를 드디어 해치웠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손으로 벌집을 떼는데, 어휴, 엄청 단단하게도 고정해놨더라. 맨손으로는 떨어지지 않아서 모종삽을 들고 와 끄트머리를 톡톡 치니까 그제야 떨어졌다. 벌집 기둥도 벌집 방 지을 때처럼 나무를 꼭꼭 씹어 침 발라서 붙인 거 아니었나? 이 정도면 슈퍼파워로 인정해줘야 한다. 내 침으로도 이런 게 되면 좋겠네.


벌집은 얇지만 단단한 나무판으로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손안에서 부서질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렇게 연약하지 않았다. 가볍지만 균형이 잘 맞고 탄탄했다. 그곳에 쌍살벌들이 살고 있을 때 그랬듯이 섬세함과 강인함에 경외심이 들었다.


예전 집주인이 남겨둔 벌집도 다 뗐다. 집에 가지고 들어와서 다시 보니, 날이 추워서 그랬나 쌍살벌이 나오다 만 채로 박제되어 있었다. 벌도 벌집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왕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생긴 김에 벌집 아래 떨어져 있던 시신도 몇 구 가져와서 같이 루페로 들여다봤다.


쌍살벌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 집 벌들은 덩치가 크니까 왕바다리겠거니 하고 있었다. 예전에 찾은 자료에서 그 사이즈에 해당하는 벌은 왕바다리 하나였다. 그런데 다른 자료들을 조금 더 찾다 보니 등검정쌍살벌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은 크기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비슷해 헷갈렸다.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을 잘못 동정하는 경우가 많다며 두 벌의 차이점을 적어둔 자료가 있었다. 자료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한 번 제대로 찾아보기로 했다. 다 죽고 떠난 마당에 정확한 이름을 찾겠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이름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기억해두면 나중에 만났을 때 더 반가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앞가슴등판을 확인해보면 왕바다리는 밝은 노란색이고, 등검정쌍살벌은 짙은 고동색이다. 집 앞에 떨어져 있던 벌도,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벌집에서 끝까지 못 빠져나오고 죽은 벌도 모두 앞가슴등판이 짙은 색이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왕바다리는 색상 변이의 폭이 넓어 등검정쌍살벌과 비슷한 색으로 보이는 애들도 있기 때문이다.


앞가슴등판으로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 구분하기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을 가장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벌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벌 얼굴 보기가 보통 어려워야지. 벌집에 영상 카메라를 설치해두거나, 성능 좋은 카메라로 줌을 당겨서 봐야지나 가능할 터였다. 그나마도 계속 움직이니까 “아, 좀! 10초만 가만히 있어 줘요!” 하고 싶어질 테고. 어차피 내겐 그런 좋은 카메라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연히 얻은 벌이 있었고, 루페도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왕바다리 수컷과 등검정쌍살벌 수컷은 비교적 구분하기 쉽다. 왕바다리는 겹눈과 머리방패가 붙어있고, 등검정쌍살벌은 겹눈과 머리방패가 떨어져 있다.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벌집에서 미처 나오기도 전에 죽은 벌, 그 벌이 겹눈과 머리방패가 떨어져 있었다. 등검정쌍살벌 수컷인가 보다.


암컷은 구분하기가 훨씬 어렵다. 둘 다 겹눈과 머리 방패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대신 머리 방패 모양이 달라서 그걸 보고 구분할 수 있다. 왕바다리는 머리방패가 넓적하고, 하단부 시작점에 미세한 굴곡이 있다. 그런데 등검정쌍살벌은 머리방패 너비가 좁고 하단부가 아래로 곧게 뻗어있다. 벌집 아래서 주워온 애가 머리방패가 갸름하고 날렵하며 하단부가 좁고 길었다. 등검정쌍살벌 암컷인가 보다. 우리 집에 오는 애들은 매번 등검정쌍살벌이었구나.


얼굴로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 구분하기


벌집 모양을 보고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을 구분하는 법도 있다. 그런데 집 형태로 구분하려면 어느 정도 번성한 집이라야 가능하다. 옥상 문 안쪽 천창에 붙어있던 꽁다리 같은 그 부분만으로는 구분할 수가 없다. 초기 여왕벌이 혼자 지은 집 부분은 둘 다 종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경사가 져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일벌이 늘고 둥지가 성숙한 뒤에야 두 벌의 집 형태에 차이가 보인다. 왕바다리는 계속 경사 있는 모양으로 집을 지어 가운데 방일수록 더 깊은 우산 모양이 된다. 그러나 등검정쌍살벌은 초기에 여왕벌이 혼자 지은 부분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지붕이 평평한 모양으로 집을 만들어간다. 우리 집에 있던 벌집들은 전부 윗부분이 평평했다. 처음에는 조금 아리송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아무래도 우산보다는 평평한 쪽이 맞는 것 같다.


집 모양으로 왕바다리와 등검정쌍살벌 구분하기


앞가슴등판, 수컷의 머리방패와 겹눈 간격, 암컷의 머리방패 모양, 벌집 형태를 모두 종합해봤을 때 우리 집에 머물다 간 애들은 등검정쌍살벌이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암컷의 머리방패 모양도 좀 헷갈렸고, 별집의 형태도 좀 헷갈렸다. 왕바다리를 등검정쌍살벌로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니 열심히 들여다봐 놓고도 내 눈을 의심하게 됐다. 누가 또 오면 그때나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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