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검정쌍살벌이 남기고 간 집들은 컸다. 목이 이렇게 좋은데 주인도 없는 빈집들이 자리를 전부 차지하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치우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이전에 살다 간 벌이 지어둔 집이 명당자리 사인이었을 텐데. 이제 사인이 없다고 벌들이 안 오면 어쩌지? 커다란 화살표 모양 안내판을 세우고 ‘집 짓기 좋은 곳, 벌 환영, 머무는 동안 싱싱한 물 무제한 제공’이라고 써둬 봐야 이전 고객의 벌집 리뷰 하나 달린 게 훨씬 효과 좋을 것이다. 괜히 없앴나 싶었다.
“안 오면 말라지, 뭐. 좋은 데 몰라본 자기들이 아쉽지, 내가 아쉽나?” 하고 큰소리치고도 ‘이제 봄인데. 올 때가 됐는데.’ 하며 조마조마하게 처마를 올려다봤다. 누가 봐도 아쉬운 쪽은 나였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면 꿀벌이 사라졌다는 기사가 떠오르곤 했다. 혹시 쌍살벌들도 같이 사라진 건 아닐까?
몇 주 그러다가 ‘아무래도 올해는 안 오나 보다.’ 하고 포기할 무렵 쌍살벌 한 마리를 발견했다. 집을 떼어버린 정확히 그 자리에 한 마리가 꼼질대고 있었다. “야! 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하고 고성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벌이 알아듣지 못 할 말로 시끄럽게 구느니 다른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경계심 없이 순전히 호의만 담아 사과나무 그늘이 드리운 바닥에 물 한 그릇 떠다 줬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려면 물이 필요할 거야.
이번 여왕벌도 등검정쌍살벌 같아 보였다. 겨울을 나는 게 고달팠나? 쌍살벌이 본디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이 여왕님은 유독 마르고 홀쭉한 느낌이었다. 물그릇을 코앞에 갖다줬는데도 물 마시러 내려오는 모습을 거의 못 봤다. 신선한 물로 자주 갈아줘도 소용없었다. 내가 너무 스토커처럼 구는 게 성가셨나 싶어 일부러 그쪽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길을 지나갈 때도 최대한 멀리 돌아갔다.
위쪽은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다 보니 처음에는 뭐가 이상한지 눈치채지 못했다. 식물들에게 물을 다 주고 호스를 돌돌 말아 선반 아래쪽으로 넣고 허리를 펴자, 딱! 딱 한눈에 들어왔다. 선반 기둥에 커다란 벌이 한 마리, 그 옆 기둥에도 또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말벌인 줄 알았다. 다시 들여다보니 쌍살벌이었다. 놀란 가슴에 괜히 더 크게 보였고, 처음 발견한 여왕벌이 유독 말라서 더 크게 보였을 뿐이었다.
다음 날 옥상에 올라갔더니 벌이 사라지기는커녕 늘어나 있었다. 어디서 나타나서 저러고들 있는 거지? 선반 쌍살벌 무리는 떼를 지어 우르르 나타난 게 아니라 각자 온 손님인 듯했다. 자체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고 한 자리씩 차지했다. 각자 오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번갈아 가며 머리 위로 날아다니니까 살짝 불안해졌다. 내가 아는 그 쌍살벌이 맞나?
나는 공포 영화 주인공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도망친 곳에 더 무서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는 게 공포 영화의 공식 아닌가. 최초의 여왕님 근처에도 벌들이 자리를 잡았더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들끼리 영역을 이렇게 겹치게 잡는다고? 좁은 데 바글바글 몰려들면 싸움만 날 것 같은데.
옥상에 다 큰 쌍살벌 대여섯 마리가 뭉쳐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겨울을 난 여왕벌 하나가 혼자 집을 짓고, 거기서 태어난 애벌레가 일벌이 되면서 세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추가로 밝혀진다. 등검정쌍살벌이나 왕바다리같이 몸집이 큰 쌍살벌들은 여왕 너덧이 모여 힘을 합쳐서 둥지를 시작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것이다. 많으면 열 마리까지도 같이 시작한단다.
얘네가 왜 이러는지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다른 작은 쌍살벌들에 비해 둥지가 커서 들키기 쉬우니 초기에 둥지를 잃게 될 위험성을 줄이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 그리고 천적인 꼬마장수말벌이 애벌레를 탈취하러 오면 여러 여왕벌이 같이 맞서 싸우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하는 글을 보았을 뿐이다.
이때 연합하는 여왕벌들은 작년에 같은 벌집에서 나고 자란 자매 벌인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묻고 싶었다. 너희가 혹시 작년에 걔네들이냐고. 나를 한껏 겁먹게 하고 나를 한껏 들뜨게 했던 그 애들이냐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들은 사라졌다. 한데 모여서 자매애를 과시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는 그냥 그렇게 없어져 버렸다. 딱 한 마리, 맨 처음 발견한 그 마르고 병약해 보이는 여왕님만 빼고는.
우리 집에 남기로 한 여왕벌은 드디어 나무껍질을 긁어다가 방 몇 개짜리 집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물도 안 먹고, 움직임도 너무 적어서 산 건지 죽은 건지 사람 속 터지게 하더니. 이번 벌은 예전 벌들만큼 수시로 물 마시러 내려와 벌멍을 때리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물을 안 마시고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없을 때 조용하고 빠르게 내려와 물을 길어 돌아갔겠지.
벌집에 앉아 빤히 내 쪽을 보는 게 경계심이 많아 보여 나도 더 신경 써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벌집과 여왕벌이 잘 있나 확인하고 싶을 때면 멀찍이 쪼그려 앉아 나무를 방패막이 삼아 쌍안경을 들었다.
예전에는 방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도 거주민 밀도가 너무 높아서 쉽지 않았다. 벌집 테두리가 약간씩 보이고 그 위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어른 벌들만 잔뜩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왕벌 하나만 집 위에 있고, 그리 분주하게 돌아다니지도 않아서 관찰하기 쉬웠다.
방 안에는 쌀알처럼 작고 희고 타원형인 알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쌍살벌의 벌집은 따로 외피도 없어서 저렇게 얹어 놨다간 주르륵 흘러내려 떨어져 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웠는데, 잘만 들어있었다. 무당벌레알도 그냥 얹어 놓은 것 같지만 잎이 뒤집어져도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아, 이거 뭐로 붙였네.’ 했는데, 벌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쌍안경으로 보는데도 알이 너무 작아서 심장이 뛰었다. 내 심장이 뛰는 건지, 저 알 속에 든 심장 뛰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는 건지.
슬프게도 나는 그 쌀 한 톨 같은 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했다. 여왕벌은 물을 안 마시고 사나 싶을 정도로 집에만 딱 붙어 있더니 어느 날 사라졌다. 다른 벌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허약해 보이더니 어딜 가다 쓰러졌나, 다른 천적에게 공격을 당했나. 며칠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집 근처에서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한참을 헤매고 다녔는데 흔적도 없었다.
여왕벌의 자매들이 남아있었다면 그들 중 하나가 새 알파 여왕이 되어 둥지를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왕은 혼자 시작했고, 태어난 일벌도 아직 없었다. 그래서 벌집의 시간은 너무 이르게 끝나버렸다. 방 몇 개짜리 작은 벌집만 덩그러니 남았다. 쌍안경으로 들여다보면 여전히 하얀 쌀알이 보였는데, 아마 돌봐 줄 이가 없어 눈을 뜨기도 전에 감았을 것이다. 허망했다.
태어나지 못한 쌀 알갱이가 잠든 작은 집은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놔둔다고 벌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데도 그랬다. 한 해가 다 지나고, 겨울이 끝나고, 다음 봄이 오고, 또 지나간 다음에도 벌집은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벌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는 빨리 발견해서 위험 요소를 없애버리려고 그랬지만, 나중에는 벌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 내가 기다린다고 벌도 나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테니 지독한 짝사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짝사랑 체질인가 보다. 저쪽이 날 좋아하든 말든, 내가 있는 걸 알든 모르든, 상대랑 마주친 날은 세상 행복한 하루였던 걸 보면 말이다. 이런 기분이라면 계속 계속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벌과의 동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 평화적 제스처를 취하고도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은 온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로 이쪽이 응급실에 가거나, 그쪽의 집이 불타는 시나리오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위험을 싹부터 잘라버리는 대신 위험을 지켜보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건 나 같은 겁쟁이가 내린 선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끝내주게 잘한 선택이었다.
하고 많은 장소 중에 우리 옥상 정원을 골랐으니 벌들이 여기 있는 동안은 평안하기를 바랐다. 나는 벌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신기한 건 벌도 나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뿐인가. 벌은 존재 자체로서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에는 꼭 ‘경이’라는 단어를 붙여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 단어를 여기에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