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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서리꾼과 마주치다

여름 한 가운데를 향해 달려가는 정원은 잔인하리만치 뜨겁다. 농라를 쓴다 한들 가려지지 않은 팔이 따가워서 옥상 일을 하려면 해뜨기 전에 후딱 올라갔다 와야 한다. 햇볕이 블루베리와 미니사과를 쨍한 색감으로 익혀주는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늘 없이 용감하게 태양과 대척 중인 나무들은 잎이 노랗게 바래다가 결국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게 다 귀차니즘에 지고 마는 가드너 탓이다. ‘태양광 패널이든 논밭에 쓰는 검은색 차광막이든 설치해서 그늘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고민만 한 지 벌써 몇 년째다. 귀차니즘에 진 주제에 합리화는 잘해서 이렇게 말했다. “강하게 키우겠어! 나무는 원래 태양 아래서 자라는 거야!”


우리 집 나무들이 사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개뿔. 너나 강해져라.” 했을 거다. 괜히 뜨끔해서 집 안에서 수경 재배하던 스파티필름을 화분에 옮겨 심어달라는 일감을 받았을 때 거절하지 못했다. “차광막은 못 쳤지만 내가 그렇게 게으른 건 아니야. 봐라. 지금도 일하고 있잖아.” 하려고.


나무들 앞에서 생색내려고 옥상에서 작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집 안에서 하면 흙이 떨어지고, 그러면 또 청소를 해야 하니까 좀 뜨거워도 차라리 옥상에서 하고 말지 싶었다. 여름 햇볕은 옥상의 열매와 함께 내 귀차니즘도 무르익게 했다.


쪼그려 앉아 “아이고 덥다.”를 입에 달고서 흙을 담았다. 빨리 해치우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주 기가 막힌 일을 목격하고 말았다. 왜 여태까지 그렇게 농익지도 않아 보이는 블루베리들이 처참하게 땅에 떨어져 있었는지, 부분부분 파이고 곪아 보였는지 알겠네.


어디서 직박구리 한 마리가 휙 날아왔다. 직박구리는 제대로 착지하지도 않고 알이 작은 블루베리만 한 알 낚아채서 날랐다. 어찌나 빠른지 저지할 틈도 없었다. 걔는 그렇게 훔쳐 간 블루베리를 우리 집 지붕에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기왕 먹을 거 화분에 앉아서 먹다가 잡히든가, 잡힐 게 무서웠으면 아주 딴 데로 멀리 날아가서 나 안 보이는 데서 먹든가 하지 왜 거기서 그러니?


그나마 걔는 양반이었다. 직박구리는 적어도 내게 등을 돌리고 몰래 먹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줬다. 직박구리가 가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온 참새는 더 얄미웠다. 직박구리가 먹은 블루베리는 좀 오래된 나무에 열린 블루베리였다. 그 나무는 따로 솎지 않았더니 꽃이 너무 많이 피어서 열매가 크지를 못하고 잔잔하게 많이만 달렸다. 그런데 참새가 내려앉은 화분의 블루베리 나무는 심은 지 한 해도 안 되었고, 묘목 키우신 분이 가지치기도 적절하게 잘한 상태로 우리 집에 보내줬기 때문에 굵직하게 큰 열매가 맺혔다. 그런데 그걸 넘봐? 심지어 화분에 내려앉으면서 나랑 눈 마주쳤잖아! 너 쪼끄만 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참새도 내 눈치를 보긴 봤다. 그런데 눈은 나한테 고정하고 고개만 슬슬슬 빼더니 블루베리를 콕 찍어보는 거다. 그래 놓고는 또 나를 빤히 봤다. ‘네가 나를 어쩔 거냐.’ 하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어디까지 가나 보자 싶어 얼음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블루베리를 마음껏 쪼아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개를 살짝 돌려 눈알은 완전히 내게 고정한 채였다.


동생은 블루베리 키워서 남 줬다고 했다. 그러게. 키우기는 내가 다 키워놨는데, 먹기는 새들이 다 먹네. 색이 잘 든 것 같길래 한 번 따 먹어봤는데, 에퉤퉤. 아직 시었다. “이 서리꾼들아, 너네는 셔서 맛도 없는 걸 뭘 그렇게 약까지 올리면서 훔쳐 먹었냐.” 하려다가 말았다. 새들이 익은 열매는 기가 막히게 알아낸다는데, 걔들이 먹은 건 맛있게 익은 열매고 내가 먹은 것만 어중간하게 덜 익어 신 열매였지 싶다.


볼 때마다 블루베리 잔해가 널려있었던 걸 보면 새들이 여기 와서 블루베리를 먹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황당하게 마주친 게 처음이었을 뿐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나는 서리 현장을 계속 포착하게 됐다. 다른 가족들은 마주친 적이 없다는데 희한하게 내 눈앞에는 자꾸 나타나 약을 올렸다.


하루는 아침 일찍 식물들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잠이 덜 깨서 가만히 나무들 사이에 서 있을 때였다. 직박구리 한 마리가 블루베리 나무가 있는 쪽 지붕 끝에 턱 앉더니 날 보더라고. 새는 인간하고 비교가 안 되게 시력이 좋다. 나는 인간치고도 눈이 나쁘고. 그러니까 둘이 눈이 마주쳤으면 그쪽이 나를 더 잘 봤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직박구리는 오히려 양 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이모티콘으로 표현하자면 ┏(>◇<)┐ 이런 모양으로. 소리는 얼마나 날카로운지 비몽사몽 하는 고막에 아주 콱 꽂히더라. 나도 똑같이 어깨 깡패 포즈로 서서 녀석과 대치했다. 내 쪽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 - ·)┐


내 덩치가 더 크고 무시무시한데도 직박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블루베리 화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제가 이 정원의 소유주인 양 당당하게 열매를 따 입에 물었다. 뻔뻔하게도 블루베리에 부리를 갖다 대기 전에 나를 향해 더 크게 “빼애액!”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직박구리는 열매를 물고 다시 지붕 모서리로 날아가 옆 눈으로 내 동태를 살피며 한입에 꿀꺽했다. 걔가 그러는 동안 나는 그 사나움에 굳어서 아까 취한 ┏(· - ·)┐ 이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걔가 가고서도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민망해져서 팔을 내리고 “내가 꿈을 꾸나.” 웅얼거리며 비척비척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블루베리를 먹는 직박구


직박구리가 조류계의 조폭이라더니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울음소리는 고막이 뚫리게 날카롭고, 자기보다 큰 동물도 무서워하지 않는 호전적인 성격에, 머리 깃을 곤두세우면 머리에 왁스를 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 딱이다. 게다가 직박구리는 무리 지어 다니기까지 한다.


그게 바로 무서운 부분이다. 직박구리 하나가 텃밭에서 뭘 먹고 있다는 건 곧 그 직박구리가 자기 무리의 다른 직박구리도 데려와서 쪼아먹을 거란 뜻이란다. 그리고 상황은 여기서 더 무섭게 전개될 수도 있다. 직박구리 네트워크가 있어서 조만간 동네 직박구리들이 우르르 텃밭을 털러 온다고? 처음에는 도시 전설인 줄 알았다.


괜히 무서운 얘기를 읽었나? 우리 집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 직박구리가 계속 눈에 띄었다. 매번 같은 애는 아닌 것 같고 여러 직박구리가 ‘흠, 여기가 소문의 그 집이냐.’ 하고 번갈아 가면서 사전답사를 오는 것 같았다. 옆집 지붕이나 근처 건물 위에 있는 탑 같은 안테나에 앉아 이쪽을 빤히 보는데 내가 뭘 어쩔 수 없어서 똑같이 노려만 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새에 관한 수업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새를 향해 손가락질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손가락으로 “저기!” 하고 가리키면 눈이 좋은 새한테는 자기 눈알을 찌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못난 제자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응용법을 떠올려버렸다. “여기는 우리 집이고 너는 블루베리를 털어갈 수 없다!” 하고 손가락 두 개를 직박구리를 향해 찌르듯이 쳐들었다. 그러면 쟤가 직박구리 네트워크에 가서 “야, 세상에. 거기 가지 마라. 웬 성격 고약한 인간 하나가 눈을 찌르려고 하더라.” 하고 소문을 낼 테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민망하게도 직박구리는 미동도 없었다.


새들이 계속 와서 블루베리를 먹으면 방조망을 씌워두라는 충고를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귀차니즘 문제가 아니었다. 블루베리 나무에 걸친 거미줄이 많아서 그걸 망가뜨리지 않고는 보호망을 씌울 수 없었다.


보호망 대신 실을 얼기설기 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면 새들이 날개에 실이 걸릴까 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다고 했다. 글쎄. 그러다가 자기 입보다 큰 블루베리에도 욕심부려 접근하는 참새 같은 애들이 오면? 실이고 뭐고 일단 먹고 보겠다고 들이대다가 진짜 날개가 걸리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더 엉켜버리면? 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스파 영업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와서 쉬다 가라고 했으니 조식은 서비스로 하자. 사우나에 와서 목욕하고 물 마시고 했으면 블루베리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아이고 귀찮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 하고 새들이 와서 블루베리를 먹게 놔뒀다.


멀리서 손가락으로 직박구리 찌르는 시늉하기도 그만뒀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 그랬으면 “쟤가 손가락으로 찌르려 한 걔야.” 하고 소문내서 다른 직박구리들을 우르르 끌고 와 정의의 심판을 했을지도 모르지.


참새들이 블루베리를 먹다가 또 걸리면 놀라지 말고 편하게 먹으라고 바보 허수아비인 척했다. “이 집 소문났어. 호구라고.” 하고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신기하게도 여름 내내 우리가 먹을 블루베리는 충분히 많았다. 이 자리를 빌려 저를 포함한 많은 먹보들을 먹여 살리신 능력자 블루베리나무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님이 풍족하게 베푸신 덕에 저도 관대한 허수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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