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제스처로 쌍살벌에게 내밀었던 물 한 그릇을 노리는 방문자들은 많았다. 다른 곤충들도 그릇 테두리에 묻은 물을 핥아 먹는지 잠시 앉았다 가곤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그릇에 끌리는 건 새들이었다.
내가 쌍살벌에게 물을 내밀기는 했지만, 그러기 전부터도 옥상에는 항상 물이 있었다. 정원 한 귀퉁이에 놓인 커다란 대야에. 전날 내린 비가 모여서 그렇게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비가 오지 않은 날에도 항상 물이 차 있었다. 그럴 수가 있나? 아무리 물이 많이 고여 있어도 그렇지. 나뭇잎이 타들어 갈 정도로 햇볕이 뜨거운 옥상에서 물이 증발하지 않고 그렇게나 많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가끔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동동 떠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물이 너무 깨끗해 보이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쓸고 나도 금방 흙먼지, 모래 먼지, 풀과 나뭇잎 부스러기들이 흩날리는 바닥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범인은 아주 싱겁게 밝혀졌다. 범인이 아니라 우렁각시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하루는 평소보다 일찍 옥상에 올라갔더니 엄마가 대야에 새 물을 받고 있었다. 왜 거기 물을 받아 놓느냐고 물었더니 “새들 마시라고.” 하고 너무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우리 집에 새가 있다고? 공원이나 하천에서는 새를 많이 봤지만, 집에 있는 새는 내 평생 아파트 에어컨 실외기 선반에 똥을 잔뜩 싸놓는 비둘기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비둘기도 본체보다는 똥을 더 많이 봤다.
새가 온다니! 나무가 있고 꽃이 피는데 거기 새까지 오면 그때부터는 진짜 진짜 정원이지 않나. 동물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옥상이 내가 가져다 놓은 나무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 자연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온갖 곤충들이 우리 정원에 산다는 걸 목격했으니 이미 충분히 자연다웠다. 하지만 털이 달린 동물은 또 다른 차원이다! 나는 들떠서 옥상으로 우다다 뛰어갔, 아니, 뛰지 않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걸어 올라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새들은 이른 아침 시간대를 좋아한다. 해가 뜰 때쯤이면 직박구리가 동네 어디선가 “삐이이이익!” 하고 소리를 지르고, 어떤 새인지는 모르지만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벽에 날아가는 새 그림자도 비치곤 했다. 그런데 그 새들이 우리 옥상에도 온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이제는 알았으니 새들이 움직이는 이른 아침 시간을 노려보기로 했다.
새들은 기척에 예민하다. 눈도 무척 좋아서 내가 그들을 보기 전에 그들이 먼저 나를 발견한다. 그러니 조심히 다가가도 놀라서 파드득 날아가 버리지. 나는 가드너로서는 게으르지만 관찰자로서는 적극적이었으므로 숨어서 새를 보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새들이 물을 먹으러 온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새가 와서 물 마시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면서 올 줄 어떻게 알았나 모르겠다. 우리 옥상에 주로 찾아오는 건 참새, 직박구리, 까치, 집비둘기, 멧비둘기다. 누가 오든 첫 코스는 물그릇이다. 거기서 물을 실컷 마시다가…엥? 물에 아예 풍덩 들어가 버린다. 열에 아홉은 그랬다.
도시의 새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물이 필요하다. 물 안 마시고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이 세상 어디 있겠느냐만 새들에게는 특히나 물이 필요하다. 체온이 높아 남들보다 배로 힘든 여름을 나려면 몸에 물을 뿌려 더위를 식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새들이 물을 구하기는 힘들다. 새들은 살기 위해 배수관이나 수돗가에 고인 물이나 비 웅덩이라도 찾아야 한다. 옥상의 물그릇은 그런 새들에게 생명수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얘들은 커다란 대야에 있는 물보다 얕은 화분의 물을 선호했다. 쌍살벌 주려고 뜬 물인데 자기들 덩치는 생각 않고 왜 거기들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대야에 있는 물이 너무 깊게 느껴졌나 싶어 큰 화분 받침을 몇 개 가져와서 옥상 여기저기에 배치했다. 대게는 나무 그늘에 놓아두었다. 다행히 새들 마음에는 들었나 보다.
화분 받침에 물을 채우다 보면 낡아서 칠이 벗겨진 옥상 바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칠을 하려면 여기 있는 식물들을 다 치워야 하고, 또 칠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일단 방치했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거나 호스로 물을 뿌리고 나면 정원 한 가운데 칠이 벗겨지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으로 물이 흘러가 고였다. 참새 떼들은 화분 받침보다 넓고 야트막한 그 웅덩이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그리로들 모여들었다.
새들은 요란하게 목욕한다. 물을 뜰 때 촤촤 소리가 나고, 앞쪽 머리칼도 팍팍 치고, “우르루붑루붑우르부붑!”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정석이라는 일명 ‘아빠 세수’와 겨뤄도 밀리지 않는다. 양 날개를 쫙 펼쳐 푸드덕거리고, 아예 얼굴을 바닥에 닿도록 눌러서 도리질을 치고, 빨래판에 옷을 놓고 비벼대듯이 몸부림을 쳐 스스로를 빨래해버리는데, 와, 과격함에 스피드까지 더해져 보는 사람 혼을 쏙 빠지게 한다.
목욕을 다 하고 나면 보통 화분이나 나무나 지붕 끄트머리에 앉아서 햇볕을 쬐며 깃털을 고른다. 단순히 멋져 보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깃털은 새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다. 깃털을 잘 다듬어야 체온을 유지하고, 질병에 걸리지 않고, 비행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욕 단계가 이게 다가 아닌 새들도 있다. 하루는 옥상에 올라갔다가 범행 현장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우렁각시가 아니다. 범인은 참새. 떼거리로 체리나무 화분에 들어가더니 퍼덕이고 들썩대며 흙을 다 뒤집어 놓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알고 보니 어떤 새들은 물 목욕만큼이나 모래 목욕도 좋아한다고 한다. 모래 목욕은 기생충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고, 깃을 윤기 나게 하고 물에 젖지 않기 위해 분비되는 기름이 깃털에 너무 두껍게 코팅되지 않도록 해준다. 사람으로 치면 샤워만으로는 부족해서 스크럽까지 하는 거라고 보면 되겠다.
어찌나 열심히 모래 목욕을 하셨는지 참새들이 떠난 자리엔 움푹움푹 구멍이 파여있었다. 내가 목격한 건 체리나무 화분 하나였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군데군데 움푹 꺼진 흙 모양으로 추측컨대 미니사과 화분과 야생초 텃밭과 죽은 흙들이 가는 상자도 공용 목욕탕이 되어버린 듯했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제보했더니 “어쩐지. 내가 아침마다 바닥에 흙 날린 걸 쓸어줬는데도 왜 사방팔방 흙이 다 튀어있나 했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는 엄마가 범인 후보를 일찍 짐작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새 깃털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간판을 달지 않아도 새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잘만 찾아왔다. 멧비둘기는 이른 아침 시간대를 조금 비켜 다른 새들이 적은 때 혼자 와서 유유자적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직박구리는 굳이 시간대를 계산하지 않고 자기가 오고 싶은 때 왔다. 먼저 와있던 새는 직박구리가 오면 알아서 몸을 사리고 다른 데로 갔다. 만약 가지 않고 용감하게 남아있는 새가 있다면 직박구리가 쫓아내고 혼자 목욕탕을 차지했다. 참새는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단체 손님이었다. 참새들은 전체적으로 산만한 편이어서 모래 목욕을 했다가, 물 목욕을 했다가, 괜히 옆에 있는 금귤나무 화분에 올라가서 잎을 콕 찍어 봤다가, 야생초 텃밭에 풍덩 뛰어들어 주전부리를 먹다가 했다.
정원을 만든 건 아무것도 없는 옥상이 너무 썰렁해서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복닥복닥해질 줄은 몰랐다. 나무가 있으면 가끔 올라가서 보는 내가 즐겁겠지. 그리고 꼭대기 층인 우리 집이 고스란히 받는 여름 열기를 나무가 좀 잡아주겠지. 그게 전부였는데. 그런데 새들이 이렇게 많이 그리고 꾸준히 찾아오는 것을 보니 옥상 정원은 나뿐만 아니라 도시의 다른 동물들에게도 필요한 공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을 꼭 살려두고 싶어졌다. 내가 새들에게 영원히 머물 아름다운 숲을 안겨줄 수는 없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와 잠시 쉬었다 갈 스파 정도는 내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