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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다

“먹어라! 그냥 다 먹어버려!” 하고는 마음이 편해졌다. 가드너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킬러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았다. 유능한 허수아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내가 빈 깡통은 아니다. 게을러서 그렇지 마음먹으면 새들을 내쫓을 수 있는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네발 동물이다. 그러니까 나는 새들이 야생성을 잃지 않고 나를 경계하는 쪽이 좋다.


그러나 동네에는 이미 무능한 허수아비로 소문이 난 것 같았다.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곳은 아마 직박구리 네트워크일 것이다. 탑에서 지켜보던 직박구리가 “걔 혼자서 손가락 쳐들고 뭐라 뭐라 하던데? 근데 뭐 할 줄 아는 건 없는 듯. 블루베리 가져오는 거 껌이더라.” 했겠지. 아니면 참새 네트워크일 수도 있다. “내가 눈치 살살 보면서 한 번 입만 대봤거든? 근데 가만있던데? 블루베리 가져오는 거 껌이더라.”


네트워크를 동족끼리만 만드는 거 아니었니? 동네 새들끼리 다 아는 사이인 거야? 무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말하는 동물 친구들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다 같이 손잡고 우리 집에 오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왜 나날이 새는 늘어나고, 블루베리는 줄어들고, 물그릇엔 숙박 명부처럼 깃털이 하나씩 남아있는지 설명이 안 된다.


그나마 비 오는 날은 새들도 어디 숨어서 쉬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오는데도 멧비둘기 한 마리가 정원을 방문했다. 멧비둘기는 우리가 흔히 보는 집비둘기하고는 다르게 생겼다. 집비둘기는 회색 아스팔트를 닮았는데 멧비둘기는 뒷산에 살아서 그런가 흙하고 좀 더 닮았다. 부드러운 재갈색에 날갯깃은 적갈색이다. 솜씨 좋은 옛날 장인이 깎은 나무 위에 곱게 그린 것처럼 생겼다.


비 오는 날이니 목욕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뭘 먹고 싶은 것 같지도 않았다. 멧비둘기는 지친 듯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화분으로 올라가 풀썩 주저앉았다. 나무 아래서 비를 좀 피하고 가려나 보다. 환영이지. 그런데 화분에 들어앉아 쉬면서 사람이 빤히 보이는데 등지고 앉는 건 뭐냐고. 멧비둘기는 집비둘기랑 다르게 눈치도 빠르고, 날렵하고, 사람을 경계한다며.


“나를 보고 앉아야 여차하면 도망가지. 너는 경계도 안 하니? 이 험난한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했더니 비둘기가 “후-후-욱, 훅, 훅.” 하고 울었다. 진짜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다.


너무 오래 그러고 앉아 있어서 우리 화단에서 알이라도 품는 줄 알았다. 동물농장에 보면 원앙이 아파트 20층에 알을 낳아서 나중에 이소시킬 때 사다리차도 동원하고 그러던데. 우리 집도 새가 놀러 오는 집이 아니라 눌러사는 집이 되는 건가?


비도 오고 날도 점점 추워졌다. 여기서 잘못되는 거 아닌가 걱정됐다. 알만 낳고 잘못되면 아기 비둘기는 내가 키워야 하나?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겨우 접시에 물 받아주는 것밖에 없는데! 애를 어떻게 키워서 어떻게 날게 하지?


상상 시나리오가 슬퍼질 때쯤 멧비둘기가 또 한 번 “후-후-욱, 훅, 훅.” 하고 울었다. 멧비둘기 소리는 왠지 노을이나 한숨, 밥 짓는 연기와 무거운 발걸음을 떠오르게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얘네가 주로 저녁에 울어서 그런가? 허스키한 오카리나 소리와 흙냄새, 스산한 바람이 느껴졌다.


다행히 멧비둘기는 잘못되지 않았다. 알도 낳지 않았고.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데, 그 멧비둘기 아무래도 수컷이었던 것 같다. 멧비둘기는 거기서 비나 구경하고 이따금 울다가 갔다. 멧비둘기가 한창 노래를 부를 때 방해하면 그 부분부터 다시 이어 부른다던데, 정말 그럴까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조용히 쉬게 놔두고 싶어서 노래를 끊지는 않았다.




그렇게 멧비둘기알을 키울 걱정에서는 벗어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멧비둘기 새끼를 키울 걱정을 하게 됐다. 사건은 내가 집에 없는 사이 벌어졌다. 화창한 어느 날 엄마는 옥상에서 비질을 하고 있었다. 옥상에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열어둔 채였다. 집으로 들어오던 엄마는 문득 아까 옥상에 멧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디 갔나 싶어졌단다.


어디 갔긴. 문이 열려 있으니 집에 들어와 버렸지. 걔는 계단을 내려가서 계단참의 높다란 다용도장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엄마는 문을 열어두면 얘가 알아서 다시 나갈 줄 알았다. 그리고 조금 뒤 돌아와 보니 애가 없어졌더란다. 평소 같으면 여기 별것 없으니 다시 밖으로 갔겠구나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멧비둘기가 안 보이는데도 엄마는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단다. 엄마는 계단참의 수납장을 응시했다. 그 수납장은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가구로, 어마어마하게 커서 계단 창문을 거의 다 가리며, 계단 참과 벽에 딱 맞게 맞춤 제작된 것이었다. 전 집주인이 수납광이었던 모양이다.


동생이 와서 힘으로 수납장 옆부분을 조금 당겨 앞으로 빼냈다. 우리는 이 수납장이 벽에서 떨어질 수 있는 건지도 이날 처음 알았다. 동생이 만든 틈으로 보니, 아니나 다를까 멧비둘기가 수납장 뒤로 넘어가 장과 창문 사이 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멧비둘기는 맞는 것 같은데, 비 오는 날 화단에서 울어대던 멧비둘기와는 달랐다. 덩치도 조금 작고, 목 옆에 검은 줄무늬도 없고, 전체적으로 생긴 게 좀 어린 티가 났다. 얘는 무슨 생각으로 거기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애가 조금 얼빠져 보인다고 했다.


다용도장 뒷쪽에 들어간 어린 멧비둘기


엄마는 기진맥진해 보이는 어린 멧비둘기를 다시 바깥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해 유인책을 썼다. 동생이 벌려 놓은 틈 앞에 물도 한 그릇 떠다 놔주고, 옥수수를 알알이 줄 세워 계단참에서 옥상으로 나가는 문까지 늘어놨다. 하나씩 주워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그런데 이 녀석은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냥 창문 앞에 앉아 바깥을 볼 뿐이었다.


나는 그 정도면 그냥 우리가 키우자고 했다. 하지만 얘는 야생의 비둘기고 야생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만약 얘가 우리 옥상에 터전을 잡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면 기꺼이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날개를 달고 수납장과 창문 사이에 껴서 살 수는 없다.


엄마의 어떤 노력에도 멧비둘기는 점점 더 안쪽으로만 들어갔다. 맛있는 옥수수가 겁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던 멧비둘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창문과 벽 틈새로 뚝 떨어져 아래층으로 순간이동 해버린 것이다. 아니, 벽이든 천장이든 뭔가로 막혀 있는 거 아니었나? 이사 올 때부터 이 집 이상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봐도 구조가 참 이상하다. 이제 멧비둘기가 있는 곳은 우리 집 신발장 뒤편이었다. 여기서 더 빠지면 이제는 꺼낼 방법도 없다.


멧비둘기도 사람도 점점 힘이 빠졌다. 자칫하다가는 얘를 죽이겠구나 싶어서 빨리 내보내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의 용감한 동생이 다시 등장한다. 동생은 멧비둘기가 다치지 않게 손으로 살짝 잡으려고 시도했다. 그게 잘 안되니까 집에 있는 기다란 막대에 양파망을 묶어 멧비둘기를 포획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오랜 시도 끝에 동생은 멧비둘기를 막대에 올라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대로 창문을 열어 막대를 밖으로 내밀고 기다렸다. 멧비둘기는 잠깐 멍하니 앉아 있더니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멧비둘기가 떠난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비둘기 깃털과 여기저기 묻은 하얀 똥들이었다. 깃털은 한참 뒤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공간에서 깜짝 이벤트처럼 하나씩 튀어나오곤 했다. 우리 셋이 아무리 머리를 맞댄다고 해도 이 어린 멧비둘기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 들어와서 그렇게까지 안 나오고 안쪽으로만 들어가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옥상 정원에서 일어난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하나 더 있다. 나는 이 사건을 완두콩 실종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하루는 완두콩밥을 해 먹으려 콩깍지를 까다가 뿌리가 이미 나온 콩알들을 발견했다. 발아병에 걸린 나는 당연히 그 콩알들을 빼돌려 옥상 상자 텃밭 귀퉁이에 심었다. 며칠 지나니 제일 빠른 애 하나가 싹을 내밀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완두콩 심을 때에는 한 구덩이에 세 알씩 심는 거란다. 그래야 새가 하나, 벌레가 하나 먹고, 남은 하나를 키워서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금 고개를 든 여린 싹도 아니고 제법 커진 애를 새가 뿌리째 뽑아 먹었다고?


그러면 뽑아간 자리에 구멍이라도 보이든가, 주변에 새 발자국이라도 찍혀 있든가. 흙이 너무 고르고 평평했다. 불길한 예감에 땅을 파봤는데 다른 완두콩도 다 사라졌다. 내가 완두콩을 심은 게 꿈에서나 있었던 일인가 싶었다.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가족들이 나한테 몰카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댔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에 장난에 그렇게 공들일 법한 사람은 동생 하나인데, 걔는 완두콩 심은 줄도 모른다.


더 이상한 건 완두콩이 사라진 바로 그 옆 바닥에서 토마토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커다랗고 덜 익은 초록색 토마토가. 그런데 우리 집에는 토마토를 심은 적이 없다. 아주 예전에 한 번 방울토마토를 심었던 것 빼고는. 그 커다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옥상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소름 돋았다.


토마토를 심은 이웃이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그 무게의 토마토가 그냥 굴러떨어져서 올 수 있는 거리도 각도도 아니었다. 어떻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태풍이 분 것도 아닌데 뭘 타고 날아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이빨 요정 같은 건가? 완두콩을 가져가는 대신 토마토를 놓고 가는 그런 요정 말이다.


좀 더 현실적인 버전으로 바꿔 말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웬 새가 익지도 않은 엄청 큰 토마토를 먹겠다고 통째로 따서 물고 가다가 퉤 뱉고 화단에서 이미 뿌리가 나서 쑥쑥 자라고 있던 완두콩을 파간 다음에 걸리지 않으려고 발자국을 지웠다? 이거야말로 꼭 인터뷰해야겠다.


인터뷰를 한다면, 비 오던 날의 멧비둘기야 “저요? 그냥 멍때렸는데요. 아니요, 여기 알 낳을 생각 없는데요. 그리고 저 남잔데요.” 이러겠지. 집에 들어왔던 어린 멧비둘기는 “저요? 얼결에 들어왔다가 겁먹고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을 뿐인데요. 유리창으로 막힌 줄 모르고 밖으로 나가려고 보고 있었던 거예요.” 이럴 거고. 하지만 완두콩 가져가고 토마토 두고 가신 이분은 누구신지, 왜 그랬는지, 뭐라고 하는지 꼭 듣고 싶다. 혹시 용의자를 아시는 분이나 저와 같은 미스터리를 겪으신 분이 계신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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