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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멀똑 Jan 07. 2024

참을 수 없는 월급쟁이 20년의 가벼움

회사생활 20년, 그동안 뭐했음?

 정신을 차려보니, 20년이 흘렀다. 이놈의 회사, 죽어라 욕하면서 다닌 게 10년, 그다음 10년은 그냥저냥 익숙해진 몸뚱이가 매일매일의 루틴을 따라 움직이며 보내왔다. 물론 회사를 다니는 동안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주식도 사고, 망하기도 하고, 수익도 좀 내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한창 찬란했던 30대와 40대가 이 회사와 함께 했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서 고마움과 아쉬움, 양가적 감정이 드는가 보다.


월급쟁이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첨에는 이렇게 오래 다닐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오래된 핑계. 10년 전에 시작했던 친구의 도시락 사업이 잘 되었더라면, 그 뒤로 다른 친구가 시작했던 파티, 웨딩 사업이 잘 되었더라면. 물론 코로나라는 전 지구적 위기가 올 거라는 걸 아무도 몰랐긴 했다. 투자금 회수도 못하고 밤늦도록 울면서 전화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힘내라, 뭐 또 기회가 오지 않겠냐 위로랍시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의 '간접' 사업을 말아먹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회사 생활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이제 몇 년 전처럼 대대적인 희망퇴직 계획도 없는 듯하다.


그 무렵 아내의 명의로 이커머스 비즈니스를 작게 시작 했다. 원래도 강아지를 엄청 좋아라 사람이라, 애견 용품을 떼어다 팔자고 얘기를 했고, 덕분에 용돈 벌이 정도로 수익이 나긴 했다. 그렇다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같이 거들기에는 뭐랄까, 좀 볼륨이 작았다. 강아지를 아내만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지. 해서 그건 그냥 아내의 용돈벌이를 위한 아주 작은 생계수단으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물론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폐점신청을 해야 했다. 열심히 떼다 팔았던 그놈의 브랜드가 일종의 유통 클렌징이란 걸 하면서, 이래저래 흩어져 있는 도매 점포들을 정리한 거다. 뭐 이거 한다고 얼마나 가격을 흐리고 유통질서가 어지럽혀진다고 말이지, 서민의 생계까지 이렇게 압박을 하다니. 미국 놈들, 여하튼 이스라엘 놈들 만큼이나 잔인하고 냉정하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니, 이제 아픈 곳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노안이 온다며 투덜대는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눈앞에서 술집 메뉴판을 술술술 읽었던 게 작년 이즈음엔가였던 것 같은데, 이제 그놈의 다초점 렌즈가 들어간 안경 추천을 받아야 할 판이다. 골프 칠 때 이걸 끼고 있으면 엄청 어지럽다던데, 큰일이다. 하긴 뭐 눈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고질적인 척추협착으로 골프를 그만둬야 할 판이긴 하다. 비용도 워낙 비싸기도 하고, 이제 골프는.. 


선배들이 우르르 회사를 쫓겨나던 2년 전 겨울,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으로 이제 몇 남은 선배들이 없었다. 동기들 역시, 이래저래 다 빠져나가고, 이제 회사에서 점심 먹고 푸념 치르느라 대화 나누는 서너 명이 전부다. 선배들을 보내고 돌아온 송별회식날 저녁, 술이 덜 깬 상황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20년이 넘도록 내가 회사에서 한 게 뭔지 한번 적어 봤다. 마케팅 부서로 입사를 해서 대략 5년, 전략과 기획을 한 5년, 나머지 5년을 인터넷 비즈니스, 그리고 최근 5년은 수출과 관련된 해외 업무. 뭐 중간에 자잘 자잘하게 들고난 경력을 제외하면, 대략 요렇게 떨어지는 상황. 그래도 외국계 회사 임원으로 이직하는 선배 하나는 틈틈이 이력서 정리를 해보란 충고를 해줬다. 영어공부도 좀 하라는 잔소리. 대부분의 선배들이 일단은 퇴직금 받고 뭐 할지 생각을 해보겠다는 것에 비해, 그 선배는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죽어라 회사일만 해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이 바닥에서 유명한 회사에 다니며 월급 받는 게 자랑스러운 적은 많았다. 그게 나의 역량이 아니라, 그냥 번지르르한 껍데기였음을 알면서도 말이지. 회사의 이름이 벗겨진 나의 이름으로 제대로 서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무력하게 잘려나가는 선배들도, 존심 구겨가며 후배들 밑에서 죽은 듯 회사를 다니고 있는 선배들도 스스로 선택한 미래는 아니었을 거다. 


그럼 이제 뭘 하며 졸업을 준비해야 할까, 졸업 논문도 한편 쓰려면 가지고 있는 도구들이 좀 많아야 할 텐데. 그게 뭔지 한번 살펴봐야겠다. 회사를 나가서도 팔릴만한 무언가. 전략기획서는 좀 쓸 수 있겠다. 그래도 한 5년 정도 경영전략을 해본 경험이 있다 보니, 복잡한 뭔가를 정리해서 기술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마케팅과 인터넷 비즈니스를 결합한 그 어떤 전략 수립? 음 차라리 교육이 낫겠다. 마케팅과 온라인 비즈니스와 관련된 교육, 서비스. 뭔가 자격증이 필요할까? 아니면 필드로 나가 뭔가 테스트를 좀 해볼까. 분명한 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졸업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겠다. 그러고 보니 벤저민 플랭클린이 말한,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에 ‘퇴사'를 더해야겠단 생각이다. 그게 월급쟁이의 숙명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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