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변하지 않는 약속 사이
병원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빠르고 효율적이며 진지한 곳. 응급실에서 스파이더맨을 만나기 전까지는.
손목뼈가 부러졌던 그날. 겁을 잔뜩 먹고 병원 한 구석에 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눈에 뭔가 들어왔다. 천장에 스파이더맨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온몸에 알록달록한 붕대를 두른 채. 저게 왜 저기 있지. 의아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의사가 깁스를 해야 한다며 천장을 가리켰다. 골라보란다. 저 스파이더맨이 가진 색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설마 샘플용일 줄은 몰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두 달 동안 핫핑크 팔로 살았다.
붕대를 감은 팔에 익숙해지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짓이겨진 철쭉꽃 같은 멍이 팔을 덮었다.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근엄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내 멍을 보더니 무섭냐고 물었다. 그렇다며 좀 울먹였다. 안 무섭게 해 줄게, 하시며 접어 올린 내 소매를 조심스레 끌어내려 멍 자국을 가려줬다. 이제 안 보이지? 걱정 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허탈해서 맥없이 웃었다.
손목 수술 후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촬영을 마친 뒤 간호사가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재촬영을 요청했다. 팔찌가...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차 싶었다. 팔찌가 뼈 사진을 가렸나. 흉터가 심란해서 기분 전환 삼아 팔찌를 차고 있었다. 너무 얇아서 낀 지도 몰랐다. 다시 엑스레이실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이유는, 안타깝게도 팔찌의 영롱한 반짝임이 엑스레이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단다. 이번엔 더 환히 빛나게 찍을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농담인 걸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긴장했던 몸이 단숨에 풀렸다.
미루고 미루다가 안과를 갔다. 10년 전에 라식 수술을 받았는데 그새 시력이 떨어졌다. 병원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나를 수술했던 노년의 의사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 기록이 남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새 담당 의사는 그 분의 손녀였다. 예전에 할아버지에게 수술받았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검사를 하고는 레이저 터치업을 권했다. 처음 낸 비용에 포함되어 있다고.
원래 그런 조항이 있었나요. 10년도 넘었고,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안 계신데. 정말 그래도 되나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입을 닫았다. 혹시 돈 또 내랄까 봐.
수술은 기억과 똑같았다. 지지직 소리, 머리카락 타는 냄새. 한참을 회복실에 앉아 있었다. 계산서는 없었다. 그 후로도 서너 달에 한 번씩 검사를 받는다. 추가 비용은 없다. 진료실을 나올 때마다 살며시 놀란다. 이렇게까지 해줘도 되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넘긴 건 차트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감각을 은행에서도 만났다. 옆 창구에서 수수료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걸 들었다. 이 나라 은행은 계좌 유지비가 다달이 붙는다. 그제야 내 계좌를 확인했다. 오래전에 개설했던 단종된 상품이고 수수료가 전부 면제였다. 지금도 팸플릿에 적혀 있다. 기존 고객에 한함이라고. 나는 잊어도 약속은 이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친구는 이사 가시는 부모님 댁을 정리하다 서류더미 안에서 홈디포 상품권을 발견했다. 수십 년은 됐을 빛바랜 종이 쪼가리. 혹시 몰라 가져갔더니 No problem 이란다. 유효기간이 없어서 괜찮다고.
굳이 안 해도 될 텐데 넌지시 유머를 건네고, 기어이 약속을 지켜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붙든다.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여기 있나 보다.
Honour
약속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지키겠다는 의미.
"I will honour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