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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활동가 May 23. 2023

비건과 동물권과 도시사람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중인 상처받은 사람.

현재, 나는 비건지향인이다. 동물해방물결에 후원을 시작했으며, 동물권 운동을 하시는 분 곁에서 동물권 운동에 필요한 기록을 돕는 무언가를 하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내가 온 마음으로 동물권 활동가라고 스스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매번 자각한다. 나는 동물의 고통에 오래 공감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때로 동물의 고통을 배반하는 몸의 반응을 지켜본다. 논비건의 식사에 종종 침샘이 반응한다.

나는 먹지 않는 것으로 반응한다. 일상을 함께하는 주변 모든 사람들은 논비건이라, 아무도 내가 비건인지 아닌지 감시하지 않는다. 아니, 감시한다고 해도 그들은 무엇이 논비건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왜 내가 먹지 않는다 선택하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한 적게 먹으려고 먹지 않는다고 받아들인다. 이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나에게 동물을 먹으라 하지 않는 한,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저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선택할 뿐이다.

먹는 비건으로는 동물권 운동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나도 그에 동의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인간동물에게 잘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동물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한다. 조건반사적으로 분노할 때도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조건반사적 분노를 멀리 미뤄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누구나 큰소리를 내어 다른 사람에게 권유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친해졌다고 하더라도 함께 비건지향을 하기로 결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건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남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일일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듣는 사람도 괴롭다. 물론 괴로운 사실을 직면하라고 말하기도 하는 거지만, 말하는 사람의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그보다는 나는 나를 더 단속하는 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미 비건지향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내적갈등을 하는 사람이 혹여 있다면 더 괴롭히지는 않기로 하는 걸로...나도 나를 단속하는 게 괴로우니까.

반감을 사는 게 두렵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있긴 있다. 비건에 적대적이거나, 아니면 비건을 방해하거나, 하는 경우들. 비건들 때문에 비건 안 해라는 말은 그래도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애초에 할 생각이 없는데 비건 탓을 하는 게 아닌가 질문하고 싶어진다. 어쨌거나 공장식 축산이나 대량양식이나, 남획등을 하고 난 후 인간동물에게 먹히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항생제를 사용하고, 항생제 남용에도 변이 바이러스를 많이 만든다는 점에서도 인간동물에게 좋을 게 없다. 동물권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자연스럽다 느끼는 인간동물에게도 좋지 않다는 거다.

논비건 문화도 문제지만 시스템이 가장 문제다. 논비건으로 사는 건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데, 비건으로 사는 건 고정된 비건루틴을 만들 때까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하면, 해본 바로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진입단계서 다시 먹는 유혹에 흔들리거나, 인간관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는 점을 감수하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친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을 더 이상 친한 사이로만 여기지 못하는 것은, 처음에는 힘들었다. 근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논비건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서, 내 몸이 논비건처럼 반응한다 할지라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의무감으로 동물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나라도 실천하자 노력하는 건데, 동물의 고통은 내 고통이 아니라고 내 입이 즐거우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다? 야속하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괴롭다. 어차피 내 눈치 보는 모습을 보느니, 간섭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선, 같이 밥 먹는 게 괴로워진다. 나라고 뭐 얼마나 감수성이 있다고 그걸 지적하고 있냐 싶어졌지만, 그렇다고 가만 두고보기도 속이 끓었다. 그래서 자주 안 만나는 사이이거나 아예 간섭할 수 없는 사이만 관계가 유지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회사사람은 애초에 안 친하니까 상관없었다.


동물권은 내게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동물권은 내게 의무이다. 동물권 운동에 필요한 기록을 하는 것도, 기록해야 해서 기록하는 거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하는 많은 분이 그렇겠지. 누가 사체를 확인하는 일이 좋아서 하겠는지? 사체를 발견하는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계속 미루고 싶지만, 뱉은 말을 지키려고 나가고 있다. 이번 연도만 하면 더는 하겠다고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하고 있다. 혹시 또 이번년도를 버텼으니 뭔가 많이 바뀔 때까지 조사하는 걸 또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조사를 하지 않아도, 도시구조물에 야생생물이 죽지 않도록 돈을 들였으면 좋겠다... 정말 도시 구조물 때문에 죽은 목숨들을 세는 일은 너무 곤혹스럽고 괴롭다. 도시구조물에 남은 흔적을 발견하는 일도 괴롭지만, 사체를 발견하는 일은, 더더욱 괴롭다. 이제 여름인데, 부패가 진행될 텐데. 어떡하나... 내가 발견하기 전에 치우는 게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내가 기록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발견할 때까지 방치되면, 그것도 곤혹스럽겠지.


비건이 미움받는 이유라면, 공장식 축산이나 여타의 대량생산 없이는 일상적으로 동물을 먹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직면하게 해서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자주 동물을 먹는 일이 인간동물에게 나쁘다는 사실 자체를 비건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비건은 그저 사실을 들추어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지구환경에 공장식 축산 등이 좋지 않다는 사실조차도, 비건이 새롭게 만들어낸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동물권을 고민해야, 인간동물도 잘 살 수 있다는 건, 비건이 무에서 유로 창조한 내용이 아니다.


내가 설령 동물에게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나는 어떤 인간동물에게서든 동물이 고통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구에 너무 많은 권력을 행사했고, 그 여파로 기후가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동물권에 관하여 성찰하고 연결되기 전에 떠밀렸다. 나는 우선 먹지 않는 것, 그리고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두 종류의 일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다. 나머지는 상대의 자발적 양심에 맡긴다.


봐, 너도 아직 동물을 먹는 일에 반응하는 몸으로 살아가면서, 누가 누굴 뭐라고 해. 비건 하는 게 중요하다곤 하지만, 그게 스스로의 결심이 아니고선 바뀌지 않는 거 스스로도 잘 알잖아. 남의 말은 큰 영향을 주지 않아. 등등.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어쨌거나 동물권을 생각해서 동물을 그만 먹자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굳이 드러내고 말하지 않는 건, 앞서 말했듯 과거에 나도 감수성이 달라 괴로웠고 지금도 괴롭기 때문이다..


내겐 그 정도의 위치가 부여되어 있고, 이 사실이 내게 분열을 일으킨다. 더 엄격한 도덕에는 반응하지 못할 거면서, 내가 지키고 있는 수준의 도덕을 남에게 요구할 때 칼 같아지는 게 두려운 것이다. 다시금 생각한다. 내가 왜? 무슨 자격으로? 싸우는 게 두렵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할 때 그 말이 맞다고 여기는 게 두렵다. 나는 이미 그렇게 남의 말을 따라 자신을 바꾸려고 내내 노력하며 살아오다 실패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옳기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 남의 말을 듣기는 해야 한다.

나는 아직 인간들 사이에 있어야 나도 살아남는다고 믿고 있다. 이건 인간동물을 그가 누구든지 간에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좋아한다는 게 그들에게 해가 될지 득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에서도,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고서도 다가서는 건 두렵다. 상대를 좋아하는 건 언제나 내 관점을 뒤집어씌우는 일이다. 그를 특별히 별다르게 봐서 그런 게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나의 무언가를 해방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인 채로 그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나 자신을 좋아하려고 그를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 자신을 좋아하려고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데, 그 수명은 매우 짧겠지 싶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러는 게 영 싫은 건, 그 수명이 짧다는 걸 알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에너지가 강한 편이라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욕구를 짓누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와 함께 있는 그 사람은 짓눌린 채로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싫은 거다. 그 자신인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관계의 지속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으리라고, 그런 허망한 꿈을 아직은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의 수명은 내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그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수준의 모순을 유지하면서 조심조심 사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의무가 있는 한,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마저도 때때로 의무이기만 한 것으로 변하는 것도 알고 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내 상태와 관계없이 관계를 이루기 위한 규칙을 필수적으로 지켜야 한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어서 내내 살기로 도로 결심했었다. 그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내게 과도한 짐이 되지는 않을지 두려워서, 미래가 너무 캄캄하다. 이건 아마, 나 자신조차 내게 지금 짐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사람이 매번 미래 없이 행동을 감행하나. 어쨌거나 불안 속에서 계속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

나는 눈치라고 하나도 없는 인간이다. 나한테 약한 소리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눈곱만큼도 모른다. 그러나 봐라. 여기 아무도 모를 익명의 브런치에조차도 구구절절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이건 모순이다. 남을 보살필 줄도 모르는 인간이 자기 고통에는 이렇게 민감해서야 괜찮나. 한편으로는 내 고통을 확장해서 느끼면, 사회운동을 하게 된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근데 사회운동을 한다고 누가 날 책임져 주는 게 아니다. 그 점이 사회운동을 할 때 힘든 점이기도 하다. 절박한 필요 때문에 사회운동이 시작되지, 뭔가 보장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밥벌이를 책임지지 않는 건 당연하게도 보인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책임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일하고 싶었다. 의미 있는 일은 왜 지금 내 밥을 책임지지 못하는 건지 싶다가도, 평온하게 누군가를 아끼고 내 힘이 도움이 되는 일상이 오래 유지되는 게 좋은 거지, 사회운동을 해야 하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그게 밥이 되는 게 뭐가 좋겠냐 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일상이 가능하도록, 지금 당장 시스템의 폭력을 멈추려고 사회운동을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일은 너무 길고 지난하다. 그 사이에서 밥을 찾아서 헤매야 할 만큼이나...

그러니 내가 선택하고픈 것은 사회운동에 깊게 발 담그지 않고 생산자로써 살아가고 틈나는 대로 연대하는 것이다. 도시인간으로서 밥벌이를 하는 것 말고, 화폐를 버는 것 말고, 자본주의 바깥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는 생산자 말이다. 동물에 감정이입할 때는 내 고통에 이입할 때라 이건 진정한 공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자각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한다고 착각을 한다. 비건을 지속하는 것도 사실, 고통에 꾸준히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법칙을 따르는 것뿐이다. 나를 형성해 온 법칙에 저항하면서, 새로이 만든 법칙에 순응하는 과정...

동물을 먹지 않는 일은 가장 처음 행한 의무이다. 동물권 운동에 필요한 기록을 돕는 일은 두 번째 행한 의무이다. 의무를 행해도 동물들은 사육 후 도축되어 식탁에 오른다. 동물의 고통에 실시간 공감했으면 나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도 같다. 동물보다 내 목숨을 더 생각한다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동물을 먹지 않는 것까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물을 먹는 일을 역하게 느낄 때까지는 시도해보려고 한다. 동물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번 실감하고 있지만, 의무로 나를 지탱하고 있다. 언젠가 봇물처럼 쏟아질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하여튼 동물권 감수성이라곤 없는 도시인간인 내가 비건으로, 동물권 운동에 새끼발가락만 담그고 있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말해보았다. 이 글을 쓰리라 기획할 때는 자연과 쉽게 멀어질 수 있는 환경에 살았고, 연결감을 잃어버렸을 때 회복할 방편이 많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차분히 확장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이렇게 뒤죽박죽 쓰는 게 아니라... 동물의 얼굴을 관찰해 본 경험이 없고, 다큐로만 동물의 고통을 알아서 동물권 감수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또 길게 구구절절 쓰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이야기인가 이제와선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니 그에 관련된 공부를 더 많이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나에게는 동물권운동을 해온 역사가 긴 선배가 많다. 우선, 밤이 너무 늦어 이만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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