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정기적으로 수입을 얻게 되었을 때, 나는 이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랐어. 배를 불리거나, 마음을 두껍게 하거나, 불면을 없애주기를 말이야.
절대 쉽지 않았어. 셋 중 하나만 되었어도 난 배움 적금을 들지 않았을지 몰라.
틈틈이 '배움 적금'이라 이름 붙인 계좌에 돈을 넣었어. 나는 배우고 싶은 나를 정말 좋아하거든.
배우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돈이 없어서 배울 수 없다면 심히 자괴할 것 같았어.
나는 삶의 원동력을 나라는 존재 키우는데 몰두하는 면이 있거든.
얘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갈 수 있나, 말할 수 있나, 쓸 수 있나, 느낄 수 있나를 더 잘 키우고 싶나 봐.
그렇게 1년 새 배움 적금이 만기 된 날, 나는 빵집에서 무려 호두파이 한 판을 샀어.
축하할 일이 있다고만 말하고 아무 추가 설명은 하지 않은 채, 가족 모두 모여 초를 불고 파이를 나눠먹었어.
그리고 요즘, 감히 이렇게 말할게. 나는 요즘 배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어.
복싱을 배운 지는 이제 3개월이 되어 가.
'백 엔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주인공이 복싱을 하면서 강해져.
몸과 마음이 전부 다 새로 태어나 버려.
그래서 그다음 날 집 가장 가까운 복싱장에 가 상담받고 바로 등록까지 했어.
생각보다 복싱은 정적인 운동이야. 링 위에 올라가기 전에는.
'순정'이라는 말이 왜 복서 앞에 붙는지 알겠는 만큼.
정말 고독하고 정말 정직해. 묵묵히 출석해서 핸드랩 감고 줄넘기하고 스텝 밟는 게 다 야. 진짜로.
우리 체육관 한 쪽 벽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이 말을 듣고 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너무 가혹하다고 여길지, 아님 그저 뻔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처음엔 나도 비슷한 감상이었는데, 실제로 그 글자 바로 밑에서 원투 원투 쨉쨉 원투 위빙 하는
날들이 늘어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저 말은 .. 그럼 반복만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복하기만 하면?
그 순간 놀랍게도 반복이 고행길이 아닌 지름길처럼 여겨지더라. 신기한 일이야.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고독한 반복 속에서 나는 늘 장난기 어린 얼굴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거야.
전면에 세워진 전신거울이 나를 아주 우습게도 비추고 있거든. 새로운 동작을 나갈 때마다 나는 팔다리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 고관절과 갈비뼈는 생경한 단어라는 표정도 짓지.
나 되게 뚝딱거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뚝딱거려. 약간 실실 쪼개면서.
그리고 내 양옆에는 순수하게 땀을 죽죽 흘리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
가끔 코치님이 밑도 끝도 없이 버피 100개, 점프 스쾃 100개 하고 가세요.라고 말해도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감추고 금방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접었다 폈다 하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어가고 있어서 그런 내가 좋아지는 중이야.
두 번째 배움은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마음속엔 몇 년이고 길게 품고 있던 거야.
베이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 너는 알고 있지, 내가 베이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베이스를, 베이스의 물성을, 베이시스트를, 베이시스트의 분위기를 나는 다 좋아했잖아.
밴드 음악을 사랑하면서 늘 나의 귀를 가져간 건 베이스였어. 둥 둥 하면서 나도 같이 떠올랐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베이스가 없으면 밴드는 구성조차 할 수 없다는 걸.
눈에 띄지 않는 자의 뿌리가 가장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 뿌리를 진작에 알아버린 나는 더 아래로 아래로 들어가고 싶었어.
첫 레슨 때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어. '왜 .. 베이스를 .. 배우려고 .. 하시나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지. '묵묵하게 자기 일하는 게 멋져 보여요'
'아! 제대로 찾아오셨네요!'라고 눈을 겨우 담는 작은 안경을 쓴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
나에게 베이스는 스스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악기 같아.
내가 필요하다는 걸 스스로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검지와 중지로 뿌리를 내릴 기회를 얻는 거지.
내가 나중에 가장 연주하고 싶은 노래는 Esperanza Splading의 I know you know라는 노래인데
이걸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너에게 들려줄 수 있는 날은 또 올까?
그날을 기다리면서 나는 왼 손목을 꺾고, 오른 손가락을 열심히 튕기고 있을게.
살면서 잘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사람 잘 하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
이제 와 영재나 신동은 어렵겠지만, 그런 내가 어떤 천재가 될 수 있다면 배움의 천재가 되고 싶어.
잘 배우는 사람보다는 배우기를 잘 시작하는 사람으로 천재가 되고 싶어.
돈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쓰고 깨끗하게 비워내는 사람으로.
스스로 허접해지기를 겁먹지 않는 사람으로.
두 눈을 밖으로 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사람으로.
궁금한 것과 부족한 것을 열심히 질문하는 사람으로.
더 잘하는 사람에게 더 못하는 사람이 배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다음에 난 어디서 또 고개를 갸우뚱대고 손발을 허우적대고 있을까? 너도 궁금해? 나도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