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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새벽진료


진료의 시작은 내가 K를 닮은 사람을 서울에서 지나쳐 본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죽 재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인파를 슈루룩 빠져가가는 것이 딱 K라고 생각했다. K의 활동지는 주로 전라북도 전주이므로 반가운 나는 문자를 보냈다.


‘헐 너 지금 한강진이야!?’


’아니?? 왜??‘라고 답장이 왔지만 나는 그 답장을 잠금 화면에서 휘리릭 지워버리고는 ..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K를 닮은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내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며칠 뒤에 서울에서 널 닮은 사람을 봐서였다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에 답장을 바로바로 보내는 나에게 K는 대뜸 묻는다.


‘너 지금 술 먹어??’


다음 날이 휴무라 영화를 틀어놓고 소파 앞에 누워있던 나는 소리 내어 풉 하고 웃는다. 아마 K가 대부분의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대학교 2학년 때 새벽 내내 부어라 마셔라 하는 모습일 테고, 읽씹을 잘하는 나의 응답이 빠를 때는 술 마시다가 K를 부를 때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고 지금은 그냥 집에서 누워있다고 약간 참회하듯 나는 대답한다. K는 요즘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험 날이 되면 10개의 방을 돌아가며 열 명의 환자와 의사 시뮬레이션? 하는 걸 시험 보는 거라 했다. 환자의 탈을 쓴 시험관에게 “안녕하세요 학생 의사 누구누구입니다- ” 하고 들어가서,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등등을 알아내고 그에 맞는 진단, 해야 할 검사, 예후 및 주의사항 같은 걸 설명해 내야 하는 시험이라 했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앞둔 시험을 설명해 주다 K는 ‘너 어디 아픈데 없어? 맞춰볼게’ 한다. 그러고는 전화를 걸어 ‘웅 ~’이라고 하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이름도 부르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네 안녕하세요 학생 의사 K입니다’ 했다. 그러면 나는 ’아 예 ..’ 하고 조금은 어이없고 조금은 웃겨 하며 진료를 받는다.


전화 너머의 학생 의사는 눈 앞에 환자가 있는 듯 오늘 날씨에 대한 스몰토크로 긴장도 풀어주고 청진기를 댈 때는 불쾌하다면 여자 의료진을 불러준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내가 만난 어느 의사보다 꼼꼼하고 착실하게 내 몸과 마음을 진찰한다. 질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식욕이 줄었다면 몸무게는 원래 몇 키로였고 지금은 몇 키로인지, 최근에 어딜 다쳤는지, 머리카락은 얼마나 빠지는지, 최근 평균 수면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피부가 푸석푸석한지, 얼마나 어떻게 불안하고 우울한지, 스트레스 해소법이 무엇인지.


친구 K에게는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못 느꼈던 대답을 의사 K 에겐 다 해줄 수 있었다. 살면서 내가 다닌 동네병원과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병원에서 만난 모든 의사를 합쳐도 이렇게 환자에게 관심도 많고 다정하며 친절한 의사는 처음이었다.


나의 대답만으로 K는 내가 이러이러한 상태이니 피검사를 받아보고 처방해 준 약을 일주일간 먹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내원하라는 말과 함께 진료를 마쳤다. 모든 의사가 그렇듯 스트레스 관리 잘 하고 잠은 충분히 자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제 존댓말을 풀고 의사와 친구 그 어딘가의 경계에서 나를 많이 꾸중하고 약간 걱정하기 시작했다.


“너가 3교대하니까 그래 .. “로 시작한 잔소리는 ”밥은 그래도 제때 챙겨 먹어야지 너 그러다가 몸 다 상해... 그리고 발목 다쳤다며, 내일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가만히 책 읽어 좀 쉬어라 좀. 내가 아까 말한 그거는 꼭 병원 다시 가 봐, 아직은 젊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로 끝나는가 싶더니 ”내일은 꼭 집에만 있어 절대 운동 가지마!!“ 라는 신신당부로 끝이 났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물리치듯 아 알았다고요 ..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대답을 한 뒤 환자로서 대답만 하다 이제는 내가 이야기를 쏟아낸다.


벌써 나는 이 병원을 다닌 지 7개월이 지난다는 이야기, 내가 대학을 두 번이나 바꾸고 거주지를 세 번이나 바꿀 동안 너는 아직도 졸업을 못했다는 이야기, 네가 요즘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이야기 등등 온갖 주제를 가볍게 넘나들며 우리는 세 시간이 넘도록 계속 떠든다.


나는 중간중간 너랑 대화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하면서 너의 복제인간 5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화가 즐거운 이유까지는 전하지 못했지만, 이 글에서 전하자면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가볍게 다 말해주는 너와의 대화가 좋다. 네가 어떨 때는 자신감이 생기다가도 또 어느 때는 금방 죽어버리고 싶은지 말해주어 좋다. 내가 말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 그런지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고 불안하고 어쩌고를 말할 줄 알아 그렇다.


그래서 나는 K 앞에서 쉽게 약해지고 쉽게 강해진다. 쉽게 약해지는 이유는 위의 의사의 탈을 쓴 모습에서 보이는 치밀하고 빈틈없는 걱정을 받고 싶어서이고, 쉽게 강해지는 이유는 가끔 혹은 자주 불안하고 죽고 싶은 너에게 쌀 한 톨 만큼의 짐도 되고싶지 않아서다.


회사에서 만난 정신 빠진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K는 자기가 그 수치를 겪은 것 처럼 같이 욕 해주다가도 ”그런데 사회에 그런 인간이 한 명 씩은 있더라고 ... 화나지만 어쩔 수 없어...“ 하고 덧붙인다.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나는 K를 미워하고 싶겠지만 영리한 그는 ”나도 너한테 어쩔 수 없는 걸 말해줘야 하는 게 너무 슬프다고 생각해“ 하고 덧붙인다. 그럼 난 또 맞아맞아 너와 나의 잘못은 아니야 어쩔 수의 잘못일 뿐이야 하고 금방 사그러든다. 어쩔 수 없는 것만 말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K가 어떤 의사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매일같이 병원에서 만나는 주치의들(회진 돈 다며 병동에 와 환자를 한 명당 고작 1분 30초 정도 보고 마는)처럼 될 확률이 높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K가 주치의가 될 때까지 병원에서 일하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


그래도 난 학생 의사 시절의 K를 알아서 다행이고, 의사와 환자의 사이보다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K의 미래가 괜히 기대된다. 지금 K는 불안정 할 때의 지난 날보다 꽤 나아 보인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알에서 깨기를 기다리고 있는 K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를 봤다는 한강진이 대충 한강 주변이라는 줄 알았다는 이 시골쥐에게 어떤 세상이 오게 될지 나까지 덩달아 설렌다.


저렇게 전화로 3시간을 떠들다가도 나중엔 이걸 같이하자 저것도 해보자 하다가도, 서로 원하는 게 다르면 우리는 언제든지 ‘넌 그럼 그거 해. 난 이거 할래.‘ 할 수 있어 이 대화가 좋다. 새벽 4시에 겨우 전화를 끊은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K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재잘댄지는 벌써 7개월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충분히 추웠는데 그 화사한 봄과 무더운 여름을 지나 벌써 다시 추위의 계절들이 오고 있다. 감기 걸리지 말자고, 내일 후드티에는 반팔을 꼭 챙겨 입자는 말로 우리는 각자 잠에 들었다. 아, 그리고 오늘의 대화로 내가 7개월 치의 K를 몰아 받은 거라 했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있다. 어떠한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늘 나만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선택만 했던 날들이었다. 나만의 이유로 동떨어진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대학교를 옮기고, 잘 지내던 지역에서 벗어나는 일들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뒤로한 채 내린 선택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아프지만 그냥 견뎌냈다. 나만 외딴 섬 같다는 생각을 끝없이 하면서 그 시간들을 보냈다. 어떤 날에는 '이 거리는 똑같은데 나만 없어 .. 나만 여기에 없어 .. ' 하면서 수제버거 집에서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이주민의 당연한 숙명이라 여기는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 K는 말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라는 사람을 예외로 들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을 믿는 너를 돌리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자주 만나고 자주 연락하는 사이에서만 친밀함을 찾지 않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새벽 진료를 받은 다음 날, 나는 나의 예비 주치의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서 과자를 냠냠거리면서 드라마 6편을 내리보고, 이불 구석자리에서 책을 내내 읽었다. 읽다가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또 읽었다. 어쩐지 아무것도 안 한 하루를 보낸 내 자신이 기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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