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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HER

언제부터 우리 역할이 바뀌게 되었을까. 나는 단 하나의 의문도 참지 못하는 아이였고 그 하나가 생길 때마다 엄마를 찾곤 했었는데, 왜 이제는 의문이 생길 때 포털 사이트 검색창을 먼저 찾아보는 아이가 되었을까?

엄마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지 차마 알 새도 없이 그 답을 찾아내고는 고개를 휙 돌리는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그런 날 볼 땐 서운했어? 아니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겼어? 엄마도 이런 경험이 고작 두 번째일 뿐일 텐데, 첫 번째의 경험을 두 번째에 녹일 새도 없이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했어?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이제 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지나치게 필요는 없다.라고. 어차피 인생은 혼자고 나는 이미 혼자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인생을 살아내고 있고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솔직히 요 근래에는 많았던 것 같아.

하지만 이 말이 엄마가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단연코 아니야. 엄마는 내 탄생에 있어서 독보적으로 중요한 존재야. 지금까지 내가 되기 위한 과정 속에서도 언제나 가장 가까운 내 인생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였으니까. 그건 아무도 부정하려 들 수 없을 거야. 지금의 내가 혼자 잘 지내고 있다고 느끼는 건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 동안 빈틈없이 엄마가 내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야.

물론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말이야. 내 어린 시절 속의 엄마는 늘 일을 하고 있었어.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야 돌아와 딸들에게 얼굴을 비비고, 참관수업이나 운동회에는 오지 않아서 어느 학년부터는 올 수 있는지도 없는지도 묻지 않았어. 내 학교생활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친구들의 엄마 모임에도 끼지 않았지. 서운했던 적도 있지만 이래도 저래도 괜찮았어. 그게 나를 지키고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고 덕분에 꽤나 독립적인 어린아이가 일찍부터 될 수 있었어. 어린 나이에 독립적이란 말은 외롭게도 보이지만 학창 시절엔 그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쿨해 보이고 아무튼 이래저래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거였거든.

그렇게 엄마는 언제든 나를 자라게 '내버려' 두었지.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안전에 위험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내가 자라는 방향대로 자라게 놔두었어. 나는 정말 잡초같이 컸다고나 할까.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면 그걸 하겠다고 우기기도 전에 그냥 그걸 난 하고 있더라고. 왜냐면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으니까.. 내 선택에 지나치게 이유를 묻고 따지고 겁을 주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물론 당연히 선택의 앞 감당과 뒷감당 역시 온전한 잡초의 몫이었지. 대학에 들어갈 때는 딱 첫 등록금만 내줬어. 대학을 다시 가고 싶어서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할 때는, 수능시험 일주일 전 날까지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펐어. 논술비와 인강비를 내야 했으니까.

하여간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뭐든 쉽게 내어주는 적이 없었어. 어린 나는 용돈을 받고 싶어서 열심히 접시를 뽀득뽀득 닦았고, 조금 자란 나는 성적을 올리고 싶어서 학원 전단지를 비교해 가며 조그만 손으로 학원 문을 열었어. "혹시.. 상담 좀 받아볼 수 있나요?"라고 하면서 말이야.

다만 손으로 잡히지 않는 걸 쉽게 내어주곤 했어. 시험에 합격해도 '축하해!' 한 마디와 포옹, 불합격해도 '수고했어!' 한 마디와 포옹으로 날 맞이했지. 정말 난 살아있는 인간 잡초였지. 하지만 또 그 덕분에 밑에선 무시무시한 뿌리가 왕성하게 자란 것 같아.

그래서 어른이 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방법은 있겠지', '괜찮아 다시 하면 돼' 같은 것들이야. 이건 이 말을 많이 들어보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만이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말버릇 같은 것이지. 이렇게 살던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으며 이렇게 자란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엄마처럼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지나치게 심각해져야 할 때를 빼고는 지나치게 느슨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앞으로 더 더 진정으로 더 그렇게 살고 싶고 내 주변 사람들도 그랬으면 해.

물론 말만 이렇게 하면 안 돼. 진짜 그렇게 행동도 해야 하지. 그래서 무턱대고 내뱉지는 않으려고 해. 말하고 나서 내가 진짜 방법을 같이 찾아줘야지. 그리고 다시 할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줘야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재촉하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고 다정하게. 모든 것은 소리 없는 다정함과 함께 해야지.

이런저런 말이 길어지고 엄마의 양육법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놨지만 이거 생일 편지거든. 그래서 결론은 이번 생일도 너무 축하해. 어제 엄마 선물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 말이야. 이 옷, 저 옷 막 입어보고 이건 어때? 저거 입어볼까? 하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유독 딸들이 엄마에게 뭐든 많이 이입한다고 하잖아. 그건 은연중에 엄마를 나의 미래로 여겨서 그렇대. 그래서 내가 엄마가 겪는 부당함에 크게 저항하고 분노하고, 엄마의 건강 악화에 가장 노심초사하고, 엄마의 초라함에 가장 자존심 상해하는 거야. 내 미래를 내 눈으로 보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도 엄마 당신을 위해서도 엄마는 필수적으로 잘 살아야 해. 그리고 언제나 어린 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어서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어른으로 자라난 내 모습이 내가 마음에 들어. 내 미래도 당신에게 좀 맡겨보고 싶은 마음이 듬뿍 들어.

그러니까 더 넓은 세상에서 더 새로운 마음을 품고 나와 같이 오래 지내줘. 나도 더 착한 마음으로 엄마가 물어보는 엑셀, 파워포인트 더 잘 알려줄게. (편지에 쓸 순 없지만, 다 알고 있는 거라도 나도 엄마한테 가끔 물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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