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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새벽의 알몸

어떻게 일해야 잘 일했다고 소문이 날까는 일하는 누구도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쉬어야 잘 쉬었다고 소문이 날까? 어떻게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이런 소문의 당사자만이 되고 싶다. 어느새 일하는 것 이외에는 쉬는 것과 노는 것이 동일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 놀이 시간이라는 마음이 들어 들뜨게 되고, 정신이 평온해있으니 뭘 해도 쉬고 있다고 여겨진다. 일하는 상태가 아닐 때에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휴일은 하루, 길어도 3일 정도니까 시간의 제약이 따르고, 운전면허는 겨우 땄지만 무서워서 운전도 못하고 이 시간을 이동 수단 안에서 머물기는 억울해서 장소의 제약도 따른다. 설명 안 해도 알 법한 돈의 제약도 따른다. 그 뻔한 외식하고 카페 가서 무지하게 달거나 무지하게 신 음료 마시는 것 말고, 바로 떠오르는 몇몇을 제외하면 요즘의 나는 언제나 알몸을 떠올린다. 몸과 마음이 정말 훌훌 가벼운 상태로 자리할 수 있는 곳. 찜질방이나 목욕탕이나 스파나 온천이나 차이를 잘 모르겠는 대충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을 말이다.


달이 차오르는 보름 전날, 나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고 돌아온 엄마를 보챈다. 언제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지만, 수소문한 온천은 생각보다 멀고 엄마와 함께라면, 아니 그녀의 글로벌 경차와 함께라면 장소의 제약쯤은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피곤이라는 놈이 다른 모든 감정을 이겨버려 잠에 들고 말았을 법한데, 피곤한 하루를 보낸 그녀에게도 이건 나름 달콤한 말이었던 듯 그녀는 이 뜬금없는 제안에도 눈을 반짝인다. 뜨거운 물로 온몸을 노곤하게 하고 다시 차가운 물로 몸을 바짝 세울 수 있는 곳,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몇 년은 발길을 끊었던 곳으로 그녀도 가고 싶었던 것이다. 밤 11시 반을 넘은 시각, 엄마는 '이것만 정리하고 가자 ~'라고 하며 다시 아침때의 몸놀림으로 집안일을 해치운다. 재빠르게 목욕 가방을 챙기고는 이미 잠에 빠진 시어머니에게 흘리듯 외출 소식을 알린다. "어머니 선민이가 목욕을 가고 싶다고 해서 요 앞에 금방 좀 다녀올게요. 주무시고 계세요~" 그리고 나는 그제야 뭉그적거리면서 나만의 목욕 가방을 싼다. 내가 좋아하는 바디워시, 치약칫솔, 헤어팩 그리고 찜질방에서 누워 읽을 소설책 한 권을 챙겼다.

그러는 사이에 시어머니가,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가 갑자기 옷을 다 챙겨 입고 현관에서 신발을 주섬주섬 신고 있었다. '아니 나도 몸이 좀 개려워서~' 하고 그녀는 며느리가 그랬던 것처럼 흘리듯 이유를 부여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이제 오늘은 보름이다. 겨우 알아낸 용인 구석의 00 온천스파라고 적힌 곳에 어쩌다 보니 가족이 도착한다.


찜질방을 위해 가는 첫 번째 목욕에서는 탈의는 재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알몸에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알몸에만 신경 쓴다. 샤워와 머리를 간단히 감고 탕에 입수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는다. 몸이 구석구석 지져지는 기분을 위해 '약 탕'이라고 적힌 탕에 슬그머니 발끝부터 담가본다. 탕에서는 한약재 냄새가 나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 있자니 내가 마치 마녀의 마법 수프에 담가지는 개구리처럼 느껴진다. 한약재로 들어가는 개구리처럼 나는 30분간 지끈 하게 달여진다. 그렇게 얼굴만 내놓은 채로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알몸들을 본다. 말 그대로 몸 위에 실오라기라고는 머리 위에 동동 동여맨 수건 한 장만이 유일한 알몸들이다. 특히 지금 새벽의 알몸은 희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알몸뿐 아니라 나에게는 새벽의 나의 알몸도 생소하다. 내 알몸을 나도 볼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열심히 살기를 다짐하는 희망찬 아침이거나, 몸이 녹아버려서 얼른 이 기운을 씻어내고 침대로 들어가는 밤이거나, 죽기 전까지 운동을 하고 죽죽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오후뿐이다. 새벽의 나는 아주 가끔 술에 취해서 방과 거실 사이 복도에서 잠들어 있거나, 머리도 감지 않고 몸도 개운히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안 챙겨줌'이라는 벌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소파에 걸린 자세로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거나, 이미 새벽이 오기도 전에 침대 위 시체처럼 기절했거나, 정말 정말 아니면 어디선가 누구와 함께 이 세계는 멸망하길 바라지만, 이 새벽은 끝나지 않길 바라며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의 알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엄마와 할머니는 능숙하게 온몸을 말끔히 만든다. 살면서 목욕을 몇만 번을 했을 그들은 내 몸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아서 놀라울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몸도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당연함이라고 받아들이며 이 목욕을 그저 찜질의 이전 단계로 여기는 듯하다. 그들의 사이에서 나는 약간 미숙하게 몸에 묻은 약의 기운을 씻어낸다. 그렇게 1차 목욕은 끝이다. 2차는 찜질방이다.


새벽 두 시에도 찜질방에는 사람이 많다. 불도 아직 환하고, 가족단위의 손님들에서 아기들은 아직도 신이 나 지압길 사이를 퐁당퐁당 뛰어다닌다. 어릴 때는 부모를 따라 이곳에 오면 얼음방에만 들어가 있다가 또 나와서 계란을 전투적으로 깨 먹고 다시 얼음방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하면 때가 안 나온다던 엄마의 말에도 황토 방은 절대 안 갔다. 왜인지 그 뜨거움에 속하는 고통을 스스로에게 준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방금 씻고 왔는데 또 땀을 흘리고, 찝찝한 기분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어른은 역시 알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번 찜질방은 그와는 정반대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찜질방도 대체로 비슷한 패턴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얼음방은 그 입구까지만 가본다. 문을 살짝만 열어도 냉기가 온몸에 들어온다. 이 냉기를 시원하다고 여기지 않고 춥다고 시리다고 여긴다. 그러고는 옥방, 수정방, 황토 방에 차례대로 들어간다. 사실 정확히 그 셋의 차이는 모른다. 냄새도 온도도 기분도 대체로 비슷하지만 세 방의 다른 점은 천장이다. 천장에 초록색 옥이 붙었느냐, 자주색 수정이 박혀있느냐, 진득한 흙이 발라져 있느냐만 이 다르다. 방 안에 들어가선 목침을 베고 얼굴에 수건을 올려놓을 것이니 어느 방이든 상관이 없어 우리는 가장 조용한 방을 고른다. 그 방이 어느 방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그 방 안에서 느꼈을 내 몸과 마음에 내려놓음만을 기억한다. 내가 고른 방은 시간과 정신의 방인 듯 밤처럼 고요하다. 잠에 들었다가 번뜩 깰 때는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지만 악몽에서 깰 때 느끼는 서늘함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저 기분 좋은 눅진함이 따라붙는다. 이곳에 더 갇혀있다간 나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돌아가긴 싫지만 상관없을 만큼 강심장은 아니라서 4시경 찜질방에서 다시 목욕탕으로 내려간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목욕이 진짜 목욕이다. 가장 귀찮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다. 언제나 탈의는 빠르게,

세 여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몸을 탐구한다. 때를 민다는 말이다. 내 몸이 이렇게나 생산적으로 느껴진 적이 언제던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손만 스쳐도 때가 밀리는 서로의 몸을 보고 와-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다시 자신의 몸에 집중한다. 그들 중 나는 가장 키도 크고 오늘의 모든 결제를 내 카드로 할 정도로 경제력도 생겼지만 그들은 나의 때밀이 실력만은 아직 의심한다. 그들은 아직도 목욕탕에서의 내 알몸은 어떻듯 자신들의 손을 스쳐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제대로 밀고 있어? 고냥이 같이 휘리릭 하는 거 아니지? 하는 물음들이 자꾸 내 겨드랑이 사이로 밀려온다. 그 질문과 대답쯤은 무시하고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탐구하다가 등을 밀어야 할 때만은 얌전히 가깝게 앉은 여자에게 몸을 맡긴다. 하얗고 약간 노랗고 까만 서로의 등을 보며 그녀들은 말없이 묵묵히 때를 밀어준다. 나도 살면서 제대로 보지 못할 나의 등을 보며 그녀들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고 싶다. 어쩌면 내가 그녀들보다 훨씬 작아 내 몸 구석구석을 밀어주던 그때를 그리워할지, 더 바빠지고 바빠져서 더 이상 만날 기회가 적어질 미래의 내 등을 벌써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반대로 등이 밀려지는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해준다는 느낌에 취해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세신 서비스. 아무런 부담도 창피함도 없는 이 서비스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반대로 그녀들의 등을 차례대로 밀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보다 힘이 덜 드네, 덤벨을 열심히 들면서 팔 운동하기를 잘한 순간이 이럴 때 드네. 잘은 모르겠지만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때밀이를 받는 그녀들은 이 시간이 자주 반복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많은 접점이 있는 이 시간을. 한밤에 이곳까지 온 열정과 중간중간 보이는 옅은 미소로 보았을 때 그리 짐작된다. 새벽을 지나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그녀들은 집에 돌아간다. 차 안에선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다. 각자가 느꼈던 개운함을 까먹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으로 오감을 동원해서 애쓰고 있는 중이다. 오늘 한 번 이곳을 다녀갔다고 그간의 피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피로가 옅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지고 갔던 책은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시간과 정신이 멈추었는데 소설 속 이야기가 어떻게 흐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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