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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Nov 01. 2023

백신 접종

좋음은 그냥 좋은 것인 줄만 알던 때가 있었다. '좋다'라는 말의 앞뒤에는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던 때가.

그 좋던 좋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가 내가 아닌 느낌. 내가 아닌 나로 사랑 받고 싶은 비참한 기분도 든다. 사랑을 떠올릴 때 내가 그 사랑이 받고 싶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유쾌하지 않아진다. 어딘가 고장 나고 심히 바보 같다.


그러니 이는 전형적으로 사랑에 의해 일상이 좌우되는 인간이다. 이들은 그 사람들, 아니 사랑들 때문에 수 백날을 잠에 들 수 없었다. 정말 아니 정말 어쩌다가 그에게 먼저 연락이 올까 봐, 혹은 내가 용기 내 보낸 연락에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지독히도 싫어하는 모순 속에서 핸드폰 화면을 무심하게 톡톡 만져봤다. 그렇게 계속해서 깜깜한 밤 속 무거운 이불 속 축축한 마음을 숨겨내곤 했다.


그 사랑들은 치열한 아침을 지나 뜨거운 한낮과 선선한 밤에 자신의 삶에 열심히 몰두하다가 척척한 새벽이 되어서야 나를 찾아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누웠다가 앉았다가 또 옆으로 누웠다가 엎드렸다가를 반복하며 나는 고요한 새벽을 견뎌낼 줄 아는 능력을 길러냈다. 불면증이라고 투덜투덜 거리면서 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너를 기다렸다. 그건 분명했다.

잠이 와도 네가 온다고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에. 너는 언제나 잠을 이겼다. 이 사랑이 너무 커지면 진짜 사랑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사랑을 넘은 무언가 새로운 개념을 창작해 내는 지경에 이른다.


사랑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 정말 너무 간단하고 .. 작아 보인다고 ..


이렇게 나를 괴롭히던 독감 같은 사랑의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이미 다 지나간 사랑들은 면역이 생기고 그건 보통 평생 간다. 이어지지 않은 사랑이라면 모두 나에겐 백신이다.

그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희석된 항원을 약간만 사용하고 나에게 평생의 면역력을 쥐여준다. 몇 년 전에는 항원이었던 너와 몇 년 후 항체를 가진 내가 만나 새로운 항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같은 운명을 살아봤던 사람들인지라 나는 너에게 새로운 항원에 대해 더 술술 말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의 항원은 꼭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꼭 덧붙인다. 너도 몇 년 전에는 항원이었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나는 몇 년 동안 네가 통화를 할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좋아서 울렁거렸고, 너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비치려고 이것저것을 많이 바꿨다고.


하지만 모두가 나의 선택이라고 믿게 했을 만큼 너에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고. 그래서 진짜 아무도 몰랐기도 했다고. 남들과 네가 알아채는 대신 나 혼자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확인사살을 하는 시간들만이 반복되었었다고.

내 취향이 뚜렷했던 것이 아니라 네가 존재함이 뚜렷해서 내가 곧장 그 길들을 걸어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건 다 말해도 너와 걸을 땐 발이나 간격 둘 중에 하나는 맞추고 싶어서 나 혼자 엉거주춤 스텝을 밟아왔다는 것도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이제는 면역이 생겼기에 너를 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렇게 보니 인간으로서 네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너에게 전화를 걸 때도, 네가 문자 답장이 올 때도 그리고 오지 않을 때도 평안하다.

문자가 왔네. 아직 안 왔네. 하는 두 가지의 객관적 감상만이 담긴다.

이런 내가 나도 낯설지만 이건 오랜 시간 앓아온 나의 결과다. 비교적 이번 백신은 예후가 좋았다. 물론 그동안 자지 못한 잠, 먹지 못한 밥, 하지 못한 몸짓을 생각하면 그 값은 턱없이 모자라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 동안 너로 인해 변한 내가 꽤 나쁘지 않아서 너에게 조목조목 따지지는 않기로 한다.


항원을 내가 고르고 싶다고 너에게 선언했던 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 사랑이 고통일 걸 알면서도 걸어들어간다는 거야? 네가 오엔 겐자부로야? 지옥은 네가 간다 뭐 그런 거야?

내 안의 많은 내가 다시 내게 되묻는다.

처음부터 진통제 같은 사랑도 있을까. 고통이 시작점이 아닌 사랑도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나의 역사엔 없었지만, 내가 겪지 못했다고 없는 일은 아니기에. 그걸 부정하면 나는 더는 아무 세계로도 넘어갈 수 없기에 진통제가 있다고도 감히 믿어본다.

없다는 걸 몸으로 알지만 마음으로 그냥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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