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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니의 글적글적 Jul 10. 2023

아이의 첫 외박

마흔 살 힐링담론 : 독립





  "아… 머리 아파."

  큰아이가 소파에 누워 힘없이 웅얼거렸다.

  "왜? 열나? 어디 보자?"

  내 안에 장착된 위험 레이더가 아이 말에 본능적으로 작동했다. 나는 얼른 아이 이마를 짚었다. 작은 아이가 형이 걱정스러웠는지 어느새 체온계를 가지고 왔다. 나는 작은 아이로부터 체온계를 건네받아 큰아이 귀에 갖다 댔다. 곧이어 삐! 하고 체온계 알림음이 끝나는 순간, 38.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이런!’ 아이는 지난 몇 달간 결별했었던 ‘열’이라는 녀석과 재회했다.     





  

  며칠 전, 아이는 중1 교육과정 프로그램으로 청소년 수련원을 다녀왔다. 텐트에서 야외 취침과 식사 준비를 직접 해야 하는 1박 2일의 여정이었다. 야영 일이 되기 전 반 아이들은 조를 나누어 먹거리 장을 봤고, 야영 계획을 세웠다. 아이는 야영 가기 전 손수 밥 짓는 연습까지 했다. 

  저녁은 삼겹살을 굽고 아침은 떡볶이를 할 계획이라며 들떠 있었다. 가끔 컵라면 정도는 스스로 끓여 먹었지만, 아이들 스스로 가스레인지를 조작하고 밥을 지어야 한다니 그 모습이 상상이 안 갔다. 공식적인 첫 외박! 이것은 아이에게 도전과 설렘, 엄마에겐 걱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야영 가는 날이 장마철이었다. 아이는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를 불러 세워 학교 앞까지 자동차로 태워줬다.

  아이가 떠나고 비가 억수같이 왔다. TV에선 연신 비 피해가 없도록 조심하라는 뉴스가 나왔고, 휴대전화에는 안전 문자가 울렸다. 

  하필, 학교는 하고많은 날 중에 장마철에 야영 일정을 잡을 건 뭔지. 미리 잡힌 학사일정이야 그렇다 쳐도 이런 날씨에도 강행한다는 건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나는 학교에 대한 불평들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시간이 갈수록 창밖에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머리는 온통 아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밤잠을 설치고 난 다음 날, 점심때가 되었다. 학교에서 날씨가 심상치 않아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키겠다는 문자가 왔다. 아이의 휴대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나는 학교로 마중 가려다 괜히 동선이 엇갈릴 것 같아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고 몇 시간 뒤, 아이가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기름진 머리카락과 뭔가 초췌해진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뜻밖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아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온 빨래 거리와 짐 보따리들을 펼쳐놓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가 안쓰럽고, 걱정됐고, 행여 밤사이 폭우로 텐트가 떠내려가진 않을까, 마음 졸였었는데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뭐랄까 야생에서 살아와서 다행이고, 오히려 뭔가 더 커서 온 것 같아 장하다는 느낌이랄까.     


  암튼, 내가 그동안 아이를 너무 어리게 생각한 것 같다. 아이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전날 밤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시간에 쫓기며 냄비 밥을 짓고, 라면을 끓이고 친구들과 삼겹살을 구웠단다. 비가 와서 텐트에만 있다가 급기야 수련원 실내 공간으로 자리를 이동했고, 스스로 막힘없이 생활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는 그렇게 하루 동안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온 듯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직도 큰아이를 네 살 어린아이처럼 대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주장이 강한 작은아이에 비해, 순종적인 큰아이한테는 더 엄격했다. 새롭고 낯선 시도를 하려 할 때마다 어설퍼 보였고, 애써 붙잡고 주저앉혔다. ‘위험하다’ , ‘나쁘다’ ,‘안돼’라며 아이를 내 울타리에 가두고 아이를 위한 걱정인지 실은 내 두려움이었는지 미리 제거하길 바랐다. 그러면서 난 잘하고 있는 엄마인 척을 한 것 같다.


  아이는 성향상 이번 외박을 위해서 수많은 동선을 생각하고 연습했을 것이다.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려고 지난밤은 바짝 신경 쓰였을 것이고, 보기 좋게 잘하고 와서 긴장이 풀려 몸에 탈이 났을지도 모른다.     

  종일 누워 자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가 독립해야지’ 그동안 아이 주변에서 너무 서성였다. 무언가 이른 것 같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그런 독립을 꿈꾸지 않았던가. 과한 관심으로부터 독립. 나는 이제 조금 멀리 서서 아이의 도전과 실패를 응원해야겠다. 그러면 아이도 지금처럼 자신을 믿고 더욱 성장해 나갈 것이다.     






  덜거덕! 달그락. 주방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이틀을 끙끙 앓던 아이가 일어났다. 아이가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린다.

“엄마, 라면 먹을래?”

  아프면 큰다고 했던가? 첫  외박 이후, 우리 아이가 달라졌다.





사진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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