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읽고 쓰는 능력을 다시 생각하다.

by 나승철

'셈하기'와 함께 모든 교육의 기본은 '읽기'와 '쓰기'다. 거리의 간판이나 각종 고지서, 인터넷 기사와 TV 자막 등의 읽기와 휴대폰 문자에 답하고 인터넷 기사에 다는 댓글 쓰기 같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읽기와 쓰기를 제외한다면, 요즘은 일상생활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만큼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만 나면 휴대폰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현상이기는 하나, 이 시점에서 읽고 쓰는 능력을 재고해 본다. 독서는 읽기 능력을 향상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사실 이해와 더불어 추론과 상상 및 비판적 읽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면 사고력은 성장한다. 책 읽기는 또한 쓰기를 유도한다. 인풋이 독서이고 아웃풋이 쓰기라면, 시간 총량 비중은 독서로 기울지만 쓰기에 들이는 정신적 에너지 소비를 감안한다면 인풋과 아웃풋의 에너지 총량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읽기와 쓰기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문자가 발명되고 사용한 이래, 수많은 시간 동안 일부 특정 계층만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를 멀리한 채로 살았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생활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신분제도 하에 읽기와 쓰기는 귀족이나 상류층만의 전유물이었다. 교육을 실행하는 학교는 셈하기, 읽기, 쓰기를 기본으로 가르쳤다.


영어로 '학교'는 'school'인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schole'와 라틴어 'schola'를 어원으로 하며 '여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왜 학교가 여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을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노동 일은 주로 노예나 일반 서민의 몫이었다. 학문과 관련된 내용을 배우려면 지배계층이나 귀족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배울 시간 즉 여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학교는 '여가'를 잘 보내기 위한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닌 '생계'를 위한 학문을 하는 곳(물론, 학문 그 자체를 위해서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고, 민주시민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으로 바뀌었다. 아직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생계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꿈과 자아실현을 직업을 통해 해결하려고 학교에 다닌다. 공부에만 전념해야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의 탄생이 지위 높고 돈 많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학문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학교를 통해서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참 좋겠다.


일부 특권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여성들에게는 그들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읽기와 쓰기가 제한되었다. 20세기 초중반이나 되어서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락되었듯이, 읽고 쓰는 것에도 여성에게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아주 드물게나마 노예나 천민층 및 여성 중에서도 뛰어난 작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광범위한 제약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읽고 쓰는 능력이 전체 인구 중 일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읽고 쓰는 능력을 빌미 삼아, 읽고 쓰는 능력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주나 귀족 및 성직자 들은 읽고 쓰는 능력을 대대로 전수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고 계속 지배계층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어떤 상황인가. 혹시 지금도 읽고 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리더가 되는 세상은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읽고 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최상위 권력자나 돈이 많은 사람은 부족한 읽고 쓰는 능력을 지위와 돈을 이용하여서라도 보완할 수 있고, 당연히 그렇게 한다. 읽고 쓰는 능력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지배계층은 선하기도 했고 악하기도 했는데, 악한 경우가 훨씬 많았고, 또한 능력 부족인 경우도 많았다. 피지배계층 중에서 읽고 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대중의 힘을 모아 악한 지배계층을 향해 강력한 저항의 힘을 보여주었다. 읽고 쓰는 능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배계층의 탐욕과 무능 및 부정을 파악하고 고발하며 대중을 선도할 수 있었겠나? 대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현실에서도 읽고 쓰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한 국가나 사회를 대표하여 권력을 쥐고 행사하지만, 그들이 가진 한 국가나 사회의 주권은 일반 대중에게 있다. 만약, 일반 대중의 읽고 쓰는 능력이 권력자들보다 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잘못된 지배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집단지성을 발휘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지성적 힘이 부족하다면 그런 집단지성은 별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읽기와 쓰기는 민주시민으로서 반드시 익혀야 할 요소다. '시민'은 단순히 도시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며, 행동하는 지성 및 늘 깨어 있어 실천으로 옮기는 대중 혹은 민중을 말한다. 읽고 쓰는 능력은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누군가로부터 제약받거나 지배당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진정한 자유에서 나온다면, 자유를 가능케 하는 도구는 바로 읽고 쓰는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성'을 가진 책이 읽고 쓰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는 최상이지만,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디지털을 이용한 읽기와 쓰기도 점점 무시할 수는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읽기 영역에서는 디지털(오디오 북 등)이 책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고 있고, 쓰기 영역은 인공지능이 침범하고 있으며, 조만간 완전히 '대체'할 수도 있다. 이대로 가다간 아예 읽고 쓰는 능력을 기계에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기계에 의존하면서 우리는 살아도 될까?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격과 존엄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읽고 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몰라도 읽고 쓴다.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위협 속에 인간만이 보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읽고 쓴다.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읽고 쓰기의 주체는 나다. 인공지능은 학문과 공부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의 제어가 없는 기계는 위험하기도 하다. 읽고 쓰는 능력으로 사고력은 자란다. 기계를 제어하는 힘은 인간의 사고력에서 나온다. 세상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오늘도 읽고 쓰면서 하루를 보낸다.


수, 일 연재
이전 17화47. 독서의 '젠더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