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2>
내 학창 시절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가세가 무너졌고 이후에도 회복은커녕 지속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바람에 나의 초등부터 고등까지 12년 동안 우리 집은 단칸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재수를 거쳐 당시에는 조금 알려진 공대 입학은 성공했다. 가난한 집 상황을 고려하면 빠른 취직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모님의 생각을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른 결과이다.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교수님들은 물론 주변의 학우들의 성향이 한창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린 1980년대 초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인문대나 사회과학대의 가열찬 투쟁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수학과 과학이 대부분인 공대 공부는 나에게 절망감을 알려줄 뿐이었다. 문학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의 문과 기질은 공대 공부와 섞일 수 없었다. 우여골절 끝에 몇 번의 휴학은 했어도 4년 공부 만에 전공에 필요한 자격증도 따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릴 적(1960~70년대)에는 서울 변두리의 무허가 건물에 산 적이 있을 정도로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고, 단칸방에는 수신 감도가 별로 좋지 않은 라디오 이외에는 필수 살림도구밖에 없었으며, 책도 있어봐야 교과서가 전부였다. 외동으로 태어난 까닭에 자주 놀러 갈 수밖에 없었던 사촌들이 사는 집(큰집)은 '양옥'이라 부르는 번듯한 집이었고, 세 개의 방 중 하나에는 한쪽 벽면의 책장에 책이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서 나의 독서 편력은 시작되었다. 한글을 갓 뗀 시점부터 같은 동네에 살 때에는 매우 자주, 멀리 떨어져 살 때에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통해 큰집에 있는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변변한 오락 거리가 없는 당시에는 해가 서산으로 지기 전까지는 밖에서 실컷 놀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는 책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큰집에는 흑백 TV가 안방에 있었는데, 안방에는 무서운(?) 큰아버님이 계셨기에 웬만해서는 TV를 볼 수가 없었고, 사촌들이 있는 방에서 공기놀이나 딱지, 다마(구슬) 놀이 같은 것들을 하면서도 벽면에 가득 찬 책에 대한 호기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만화, 무협지, 잡지 따위도 있었지만 다양한 위인전과 한국 및 세계 문학 같은 '전집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한 페이지에 깨알 같은 세로로 적힌 글씨가 우에서 좌로 이어지면서 두 단락이 박혀 있는 책까지 읽었다.
초등과 중등 시절은 그렇게 해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교 공부 때문에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가끔은 유행하던 박계주의 '순애보' 등의 소설을 빌려 읽기도 했지만,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소설책만 읽는다는 따끔한 비난을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로부터 들은 탓에 가끔 몰래 읽는 정도에 그쳤다. 대학과 직장 생활을 거치면서 책벌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책과 멀어진 때가 있었지만,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대형서점에 가끔 들러 한꺼번에 십여 권의 책을 사다가 놓고 읽은 적도 많았다. 직장 생활의 강도 차이에 따라 또는 감정 변화에 따라 책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가까워졌지만 긴 세월 동안 책과의 연은 지속적으로 이어갔던 셈이다.
평생 책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한 덕분에 결국은 책벌레가 되었다. 어렸을 때의 독서가 가장 중요했다. 읽을 만한 책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책을 읽을 만한 공간이 필요하며, 다른 오락거리를 즐길 환경이 아니어야 책과 친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및 TV는 책 읽는 즐거움이 대체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다. 특히 스마트폰은 책과의 거리를 없애는 가장 강력한 적이다. 손에 착 달라붙어 짜릿하고 신기한 세상 즐거움을 전해주는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책을 잡는다는 게 책벌레가 아니고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스마트폰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처럼 책도 가까이 있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다. 방이나 거실에, 외출해서도 소지하는 가방이나 백팩에 책은 늘 있어야 하고, 집과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다면 책과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 있다. 어떤 작가는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놓으면 읽게 된다,라는 말도 했는데 그만큼 책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것은 독서 습관을 들이기에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