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일기예보나 천둥 번개로 신호로 주니 미리 대비할 수 있지만, 가스는 사전 예고가 없다. 혹시 1층 세대에서 연탄가스가 발생해도 아래로 내려오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어쩌다가 아내도 나도 퇴근이 늦어지거나 연탄을 교체한 시간이 안 맞으면 연탄 불이 꺼졌다. 방바닥은 차가워지고, 번개탄을 피우면 성냥갑만 한 방안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해진다. 추운 겨울밤 시간은 10시~11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벌벌 떨며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연기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연기가 다 빠져나간 뒤에도 차가워진 방바닥이 따뜻해질 때까지 계속 끌어안은 채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일요일에도 자주 회사에 출근해야 했고 어떤 때는 연탄을 제때에 구입하지 못했다.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옆집 아주머니가 연탄을 자주 빌려 주었다. 고마운 분이었다.
사랑하는 연인(픽사베이)
반 지하에 살아보니 서열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3층엔 집주인이 살고 더 높은 곳을 볼 수 있다. 2층엔 조금 더 돈 많은 세입자가 조금은 더 큰 방에서 살고 1층엔 그 보다 덜한 세입자가 조금은 더 작은 방이지만 그래도 땅의 표면 위에서 잠을 잔다. 반 지하 나의 방 천정은, 1층과 2층과 3층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지하세계의 음침한 기운을 느끼며 그래도 아직은 완전 지하는 아니라는데 위안을 삼고 살아가지만 땅 밑에서 잠을 자야 한다. 나는 그 서열체계의 맨 아래에 있었다. 서열 체계는 알게 모르게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서열체계는 생명체의 기원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저 장면은 나의 33년 전과 너무 똑같다. 햇빛이 거의 안 들어와 방은 항상 어두 컴컴했고, 창밖에 일렬로 서있는 창살들은 감옥을 지키는 보초병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방 안에서 폭이 좁은 창과 창살을 통해 밖을 쳐다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발과 다리가 보인다. 반 지하에서 바라보는 삶은 다른 사람들의 발과 다리를 바라봐야 하는 삶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하부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위로 쳐다봐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봐야 하는 곳. 그곳에 내가 있었다. 이런 곳에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삶이 녹녹하지 않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한다.
우리의 오랜 조상은 진화를 거치며 고통을 감당해 내는 방법을 발명했다. 사랑이란 것을. 사랑 함으로써 고통을 잊고 살라고, 사랑은 고통을 견뎌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고,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우리는 1년 만에 이 반 지하를 탈출했다. 더 나은 삶은 위한 열망과 사랑(지금은 곁에 없지만)이었다. 사실은 운이 좋았다.
자유를 얻기 위하여 자발적 퇴직을 하였는데 몸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요 며칠 글을 쓰느라 몸이 의자에 껌처럼 붙어 버렸다. 한번 의자에 앉으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의자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나쁜 성격 때문이다. 혹자는 이걸 몰입력이라고 얘기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어깨에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살아야 하는데, 글도 힘을 빼고 써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간다. 고려 말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여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집 앞 호수공원에 물 멍이나 때리러 가야겠다 하고 집을 나왔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불행했지만 행복했던 때, 같은 물이지만 멍 때리기 좋은 잔잔한 물과 시련을 주는 오물이 뒤섞인 흙탕물. 어릴 적 매년 여름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했던 물난리, 밤새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고, 집 앞 복개천에서 하수구를 타고 역류한 물이 금방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