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역 앞에 가면 매산 시장이 있다. 지금은 다문화 푸드랜드라는 것이 몇 년 전 조성되어 함께 들어서 있는 곳인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엔 좁고 복잡한 골목들에 낡고 조그만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있던 재래식 시장이었다. 수원에서 남대문 시장 다음으로 두 번째로 컸던 시장으로 기억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곳, 속칭 시장통에 살았다.
비 오는 날이면 땅바닥은 질척거렸으며 천정은 찢어진 천막 틈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엔 엄마는 시장에 한 상가를 구하여 닭 장사를 하였다) 시장 우측 편을 따라 복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에는 무허가 상가(대부분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복개 천을 따라서 지대가(땅 높이) 약 1m쯤 낮은 20~30여 채 정도의 기와 주택과 초가집들이 하천을 따라 나란히 있었고, 무허가 상점들과 주택들로부터는 각종 생활 오물들이 하수구로 버려졌다.
관리가 전혀 안되던 때라 버려진 오물들은 하천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비가 많이 올 때면 하천 바닥에 쌓인 오물들로 인해 물이 제대로 흘러 내려가지 못했다. 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물은 그동안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버린 주인에게 복수하듯 하수구를 타고 각종 오물들을 토해냈다. 매년 여름 두세 번씩 나의 집을 포함한 그 일대의 주민들은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홍수로 오물의 역류와 역한 냄새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73년 수원 영동시장 모습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아버지는 잠을 주무시지 않았다. “애들아~ 모두 일어나~!, 홍수 났다~” 아버지가 이렇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면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물이 넘치나 보다!' '홍수는 왜 항상 새벽에만 날까'. 온 가족은 군인들 기상하는 것 보다도 빠르게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밖으로 나왔고, 각자의 손에는 이미 홍수와의 전쟁을 위한 도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홍수로 불어난 물은 벌써 집 마당을 가득 채운 뒤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개천에서 역류한 오물들이 물과 뒤섞여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폭우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으며 집이 곧 물에 잠길 것만 같았다. 온 가족들은 연실 집 안에 들이찬 물을 대문 밖으로 퍼냈고, 물이 더 이상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사나운 비는 신기하게도 방 문지방을 넘기 5mm쯤 전에 그쳤으나, 4~5년에 한 번은 문지방을 넘어서 방바닥을 1cm쯤 점령한 후에 멈췄다. 이쯤 되면 시장과 무허가 상점들과 주택들을 포함한 이 지역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대개는 내 허리춤 정도까지 찼다.
이 연례행사는 매년 두세 번씩 이 집에 살았던 16년 동안 거의 항상 일어났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데 그땐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이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새벽에 깨어 물을 퍼 내는 일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물이 뒤섞인 물속을 첨벙첨벙 장난치듯 걸어 다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곁에 있어서였을까.
항상 언제든 먹을 것을 챙겨주던 어머니,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내 도시락에만 넣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개 넣고 꼭 챙겨 먹어라 하던.내 손을 잡고 한의원에 가며 "너는 잘될 거야"라고 말해주던 어머니. 성인이 다된 나이에 신경쇠약으로 몇 달 동안이나 매일 밤 가위에 눌리는 무서움에 아기처럼 가슴을 더듬을 때 말없이 내어주던 어머니.
기댈 수 있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등, 설령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걸 책임져 줄 것 같은 아버지. 술만 마시고 오면 기분이 좋아져서 고등학생인 나에게 팔씨름하자고 조르던, 그리고 대학 때 장학금을 타 10만 원 드렸더니 동네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사주며 자랑하던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픽사베이)
'그리운 엄마, 아버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오직 살아 보고자 일가친척,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수원땅에 맨몸으로 상경하여 온몸을 부서뜨리며 삶을 일구었다.
만일 지금 살아 있다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지 궁금해진다. 당신들께서 세상을 떠난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36년 동안 똑같이 맨몸으로 시작해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온갖 고통을 견뎌내며 한 회사의 대표이사를 하고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나는 아무것도 오르는 철부지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보다 어른 답지 못하다. 나는 오열 하고 말았다.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잘했다고, 잘 살았다고 말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