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대하듯 나를 대할 거야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영국에서 신기하게 꽃만큼은 가격이 저렴하다. 꽃을 파는 곳도 다양한데 꽃 시장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집 앞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삼천 원이면 형형색색의 카네이션 한 다발을 구입할 수 있고 장미 한 다발은 오천 원 안짝으로 구매할 수 있다. 특정한 시즌이 끝난 후에는 꽃도 세일에 들어가서 어떨 때는 장미와 국화, 카네이션들이 섞여있는 꽃다발을 단 돈 천 원에 구매한 적도 있다. 꽃에 관심이 1도 없던 나도 영국에 살면서부터 꽃에 관심이 많이 가기 시작했고 장을 볼 때면 종종 꽃 한 다발을 집어 집에 데려오게 됐다.
해를 보는 시간이 귀해지는 영국 겨울에는 꽃을 데려와 해를 대신하기도 한다. 우중충한 하늘과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무채색의 거실에 화려한 꽃을 놓으면 그나마 생기가 돈다. 그럴 때면 꽃이 저렴하다는 사실이 고맙게도 느껴진다. 꽃마저 없었다면 이 찌뿌듯한 겨울을 보내기가 참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내가 유일하게 영국에서 꽃에 사치를 부리는 시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만에 들춰보는 사진첩에는 매 겨울마다 내가 산 꽃들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데 참 많이도 샀구나 싶다. 겨울에는 일요일 아침에 일부러 일찍 일어나 동네 슈퍼에서 멀리 떨어진 꽃 시장까지 가서 꽃을 한 다발 사 오곤 했다. 그냥 늦잠을 잘걸 그랬나 싶다가도 막상 꽃 시장에 도착하면 세상이 얼마나 활기찬지,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곳이다.
꽃은 내가 힘들었던 시기를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우울증을 겪으면서부터는 집에 늘 꽃을 두었다. 꽃 한 송이가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그 연약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만만치 않다. 기분 전환은 물론이거니와 시각적으로도 후각적으로도, 향긋한 게 내가 나를 극진히 대접해 준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뿌리가 잘려나간 생화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내가 조금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든다. 매일 물을 갈아주고, 꽃대 끝을 조금씩 잘라주기도 하고, 화병에 떨어진 이파리도 건져내는 과정이 명상과도 같다. 꽃을 돌보는 것이 꼭 나를 돌보는 것 같기도 해서. 꽃을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한다면 내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보내게 된 올해의 겨울. 한국은 겨울에도 해가 잘 뜨고 영국만큼 빨리 지지도 않아서 참 좋다. 볕이 잘 드는 거실 창가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만한 호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온은 낮아도 햇살이 포근한 한국에서는 꽃 생각이 안 들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꽃 생각이 난다. 날씨와 장소를 불문하고 꽃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나는 이제 꽃 자체가 좋아졌나 보다. 이러다 조만간 카톡 프로필 사진을 꽃으로 바꾸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