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가운 국적의 만남
두 번째 시티투어도 실패였다. 카사블랑카에서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면서 왜 마라케시에서 시티 투어를 다시 한번 도전했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모르겠다. 신청하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제대로 된 나만의 첫 여행지에서 남들이 다 보고 가는 명소는 나도 다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해외 여행을 그닥 많이 해보지 않았던 나는 영 미련이 남고 찜찜했다. 금식으로 물도 마시지 못하던 마라케시의 가이드는 36도의 아프리카 날씨를 견뎌내며 마른 두 입술을 뗐다. 시기적으로 활동량을 최소화해야 하는 무슬림 가이드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우리는 투어를 하는 동안 하나이며, 무조건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혼자 여행을 하던 내게 함께하는 집단을 만들어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 좋음도 잠시, 시티 투어 가이드는 골목에 있는 귀엽게 생긴 고양이를 쓰다듬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발길이 닿는 대로의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투어는 신청하지 말았어야 한다. 서양인들 사이에서 가이드를 따라 들린 곳곳의 유적지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이때 난 확신했다. 몇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장소들을 보면 뭔가 압도되는 감정을 느껴야만 할 것 같았는데, 난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유적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덕분에 이후로는 내 입맛대로 관심 분야의 여행을 각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해졌다.) 남들도 들리는 명소를 꼭 나도 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임을 여행 내내 절절히 깨달았다. (이후로도 그런 강박부터 시작해 눈에 보이는 짐들까지 과감히 덜어내야 하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덜어내는 것은 욕심 많은 내가 꼭 배워야하는 무언가였다.)
바히아 궁전에서 집중력이 다했던 나는 나와 시티투어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휙 둘러봤다. 대충 15명 정도 되었는데, 아시아인이라곤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로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 툭툭 터지는 것 같은 엘리트적인 특유의 악센트가 가이드의 설명보다 귀에 자꾸 확 꽂혔다. 마라케시 투어에서 처음 알게 된 건지 뭔지 영국인 관광객들은 서로의 고향을 물었고 연극과 영화에서만 듣던 지역명들을 엿들을 수 있었다. 가이드는 계속해서 땡볕아래 마라케시를 향한 숱한 정보를 쏟아냈고 내 옆에 서있던 소년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음악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찢어지는 음향으로 그 소년의 귀를 타고 흘러나왔다.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투어를 온 것 같았는데, 나보다 심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속삭이는 대화를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내 바로 옆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소년에게 "KAPAT"이라고 읊조리는 그의 어머니의 말을 듣게 되었다. 소년은 가방 문을 닫았다. "KAPAT"은 튀르키예어로 닫으라는 명령조의 뜻인데,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부부끼리 주고받는 튀르키예어와 비슷한 높낮이와 발음을 지닌 웅얼거림을 몇 번 들었고, 투어 안에서 우리가 서로 대화를 트게 되었을 때 나는 용기 있게 물어보았다. 어디서 왔냐고.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찡긋 웃으며 "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또박또박 답하는 게 아닌가. 튀르키예인인데 분명... 아닌가 보네, 근데 내가 뭐라고 판단하고 있지? 싶었는데 이윽고 소년이 영국인들에게 우리는 터키인이지만 미국으로 넘어간 이민 1세대라고 소개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진행된 15명의 시티 투어에는 가이드를 제외한 딱 세 인종이 있었다. 영국인, 튀르키예인 그리고 한국인. (나 한 명) 아프리카 대륙에서 만난 세계인들과 이런 저런 언어로 어찌저찌 소통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했다. 미국 보스턴으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 튀르키예인 부부와 그들의 아들은 튀르키예어를 하는 나를 굉장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들이 17살인데, 왓츠앱 번호를 공유해서 함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과 함께. 아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도 많고 한국 영화도 많이 본다며... 아들은 이내 웃으며 입을 뗐다. 보스턴에서 살면서 가족들과만 튀르키예어를 쓰다 보니 말은 하지만 글은 잘 써 내려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보드룸 출신이었지만 놀랍게도 앙카라에서 살았었고, 그렇게 함께 마라케시 골목골목을 걸으며 앙카라 곳곳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앙카라에 거주하고 있다.) 모로코는 튀르키예와 같은 종교를 공유하지만 어떤 점들이 다른 지도 함께 이야기했다. 카사블랑카에서 느낀 이슬람에 대한 어떤 생각들을 그들 앞에서 한참 펼쳐놨는데, 부부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덧붙이며 그들은 마지막으로, 어제 가격과 오늘 가격이 늘 달라지는 튀르키예의 불안정한 삶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모든 대화에서 나라를 많이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면모가 드러났다. (튀르키예는 현재 대통령 선거날이 일주일 채 남지 않았다. 17살의 아들까지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어떻게 될 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가족을 따라 12년 전 미국에서 한 해동안 살았던 적이 있어 그때를 새록새록 떠올렸다. 10살 적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감정을 감히 헤아릴 수 있겠었냐만은 한국으로부터 넘어온 이민 1세대들의 삶은 치열해 보였다. 특히 2세대 자녀들이 모국어를 잘 지켜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년의 어머니는 자신의 가까운 지인이 모두 앙카라에 살고 있으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연락하라고 했다. 더불어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다정한 관심에서 뚜렷한 민족성이 드러났다. 다른 약속이 있었기에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마음만이라도 고마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가운 국적의 여행객을 만나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건, 단언컨대 자유여행의 가장 큰 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