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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Apr 14. 2024

라퓨타의 치기꾼

<걸리버 여행기> 읽기 3주 차


걸리버 절반을 넘게 읽었습니다.


인간이 자꾸 하찮아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너무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기는 하는데, 영 속이 편치 않아요. 중력을 거스르는 기분이랄까요.


이제 천공의 성 라퓨타가 등장하는 3부를 읽을 차례인데요, 여기에도 참 편견에 사로잡힌 답답한 인간들이 한 무더기 등장합니다. 읽을 때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요. 그런데 책을 잠시 덮을 때면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조지 오웰이 좋아한다더니, 조지 오웰도 읽다가 너무 우울해져서 그만 읽을 뻔 했었...) 그래도 끝까지 읽습니다. 책 모임 중이니까요. 함께 읽어주시는 분들 ㅠㅠ 감사해요.






주말 동안 교외의 넓고 쾌적한,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한 쇼핑몰 벤치에 자리를 잡고, 이 책을 읽었어요.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땅이에요. 라퓨타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수학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 땅이에요. 천문 분야인 듯 아닌 듯 인문학인 듯 아닌듯한 책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이 말한 ‘두 발이 땅을 딛지 않는’ 기쁨이 일상인 사람들의 땅인 거죠.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3장 발췌




<코스모스>를 볼 때 저 부분에 감동했습니다.


따로 필사도 했지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젠가 느꼈던 전율을 떠올리게 했거든요. 사람에게는 이런 면이 있어야 꿈꿀 수 있다고, 인간을 아름답게 해주는 면이 이런 거지 싶었지요. 누군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연구하고, 땅속에 묻힌 화석을 연구하니까, 인간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것이지 암암 그럼요 싶었습니다. (최근 이란 미사일을 격추시킨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보면, 머리 좋은 사람들의 수학 과학 연구가 저렇게 빛을(?) 보는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코스모스는 그래도 여전히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책입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서는, 어쩐지 다 부질없고 쓸데없다 싶습니다.


물론 걸리버가 말하는 라퓨타 사람들은 지식만 훌륭하지, 실제 인간 삶과의 연결이 이뤄지질 않아요. 걸리버의 옷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치수를 정확하게 재지만, 정작 완성된 옷은 입기에 영 불편하고. 건물들은 이상적으로 설계됐지만, 실제 건물을 지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도면이라 아주 불편하게 지어졌습니다. 기가 막히죠.


학문에 심취한 이들은 각자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들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기에, 하인 '치기꾼'을 고용합니다. 라퓨타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입과 귀에 외부적인 접촉을 가하여 깨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말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 이야기에 주목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치기꾼의 업무는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있을 때 말하는 사람의 입, 그리고 상대방의 오른쪽 귀를 주머니로 약하게 쳐서 주의를 일깨우는 것이다.
...(중략)...
항상 사색에 빠져 있는 주인은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밀치거나 그 자신이 남들에게 밀려 도랑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195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현대지성



음악 수학 등 추상적인 것만 좋아하고 현실적인 것은 무시하며 멍한 사색에 잠기는, 라퓨타 신사와 치기꾼



집에서 제가 저 치기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씁쓸했습니다.


아이가 인터넷 동영상이나 연예인 포토카드를 보면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숙제를 알려주거나 시간을 알려주는 제 모습이 딱 치기꾼이잖아요. 남편이 웹툰 보느라 약속 시간을 깜빡하고 있을 때 일깨워 주는 것도 제 몫이에요. 치기꾼이 하인이라는 점이 제일 불편합니다 ㅎ 더 불편한 것은,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 하는 일도 주로 제가 한다는 거죠 ㅎㅎ 저는 정녕 집안의 하인인가요 ㅎㅎㅎ


길에서 핸드폰에 빠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했습니다.


학문은 아니지만, 인터넷 세상에 빠져사는 요즘 우리들에게도 혹시 치기꾼이 필요할까요? 성수역 이런저런 팝업스토어들을 보면서, 테마파크 같은 판타스틱한 세상에서 노는 이 사람들에게도 과연 치기꾼이 필요할까. 우리의 할 일은 이제 저 환상적이면서 사변적인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저도 뭐 인터넷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더랬죠.


그래도. <걸리버 여행기> 읽고 있으니까.

라퓨타 사람들처럼 되지는 않도록 해야겠어요.



인터넷 세상에 심취하더라도

지금 제 몸이 있는 이 쾌적한 공간에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고

여러 소재와 부품 제조자들의 노고가 들어있고

운송해 준 사람과 그 차를 움직인 에너지가 있으며

그 에너지를 만든 자연과 인간의 노고가 있음을

굳이 인식해 봅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마음은 자주 중력을 거스르되,

몸이 붙어있는 땅도 보살필 수 있는,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네요.


오늘은 집에 가면서. 휴대폰은 넣어둘래요. 눈을 들어 흩날리는 벚꽃잎과 연둣빛 새 잎들을 좀 더 들여다봐야겠습니다. 현실 속 주변을 좀 더 관심 있게 바라봐 주고 싶습니다. 치기꾼이면서 통치자인 사람이 되어보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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