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우승이 지나간 후에

여성축구 우승 뒤 감정의 회고

by 끼우

백설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저주에서 풀리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행복한 결말 뒤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태풍이 지나간 후에 어떤가. 대지가 초토화되었어도 고요하다. 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이룬 후 인간은 허무함이 밀려온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 목표가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승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런 이치와 맞닿아 있었다.



우승 뒤 한산한 운동장


남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고 평가가 높아졌다. 그런 인정을 받고 싶어서 인간은 끊임없이 높은 목표를 향해 달린다. 우승을 한 후에 운동장은 조용했다. 많은 인원이 나오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열심히 뛴 선수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테니,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매일 나오는 이들은 취미반 아마추어 선수들이다. 그렇게 원했던 미니게임을 마음껏 뛸 수 있었고 중간중간 잡담도 전보다 허용됐다. 우승이라는 힘이 여기까지 작용했다.



우승과 준우승 사이 감정


지난 7월에 나간 전국대회에서는 준우승을 했어도 뿌듯함과 행복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번에는 우승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준우승 때보다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감정은 왜 이럴까. 운동장에서 뛰었던 출전 시간과 긍정의 감정들이 비례했다. 전국대회 때는 온전하게 한 게임은 뛰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기 끝나기 5분 전 두 번 들어갔다. (물론 내가 들어가지 않아서 우리 팀은 좋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두 번째 경험의 감정


그리고 처음과 처음이 아닌 경험들에서 오는 차이였다. 사람은 모두가 처음 겪는 경험의 감정들은 조금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두 번째 겪는 대회라서 감정들이 격하게 동화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의 부족함에 더 부끄러웠다. 이런 실력이라면 안 나가는 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풀기를 하기 시작하면 들어가는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 일부러 안 하기도 했다. 대기조의 본분을 잊기도 해 선배 언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여성축구 선수반과 취미반


대회에 나가면 선수출신 언니들은 이 팀 저 팀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한다. 여성 축구를 하는 인원이 워낙 적다. 그래서 소중하다.

“얼마 없잖아요, 저희 여자축구 선수가.
한 명 한 명 소중해서 놓치면 안 되거든요.”
-너의 꿈이 될게:지소연 인터뷰집

이 적은 인원에서도 여성축구 회원들은 취미반과 선수반으로 나뉜다. 선수반 전문팀들은 전국의 상을 휩쓸고 다닌다. 어릴 때 축구부에 들어가 배운 친구들이거나 다른 종목의 체육 선수들이 많은 편이다. 이런 선수반 팀들이 축구팀에 함께 들어와 우승을 이끈다. 이런 선수들이 몇 명이 빠지면 팀에는 큰 구멍이 생긴다. 이런 구멍에 취미반 친구들이 들어간다.



우승을 이끄는 선수반 팀들


취미로 배운 사람들만 모여서 하는 아마추어 축구인들은 서 있을 자리가 많지 않다. 생활체육은 아마추어들을 위한 분야가 아니다. 선수출신 사람들이 선수생활 이후를 위해서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선수출신 축구인들이 들어오면 아마추어 축구인들은 물러설 뿐이다. 우승을 위해서. 더 높은 성적을 위해서다. 선수 출신의 기준도 높아서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를 했어도 아마추어로 해당된다. 선수 출신과 나이대 별로 나올 수 있는 인원이 대회마다 다르게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20대 선수 출신 1명에 아마추어 선수 1명, 30대에 선수 출신 1명, 아마추어 선수 5명.... 이런 식이다.



운동은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나이가 많을수록 축구의 시작은 어렵다. 배운다고 해도 실력을 따라잡는 일은 노력이 몇 배가 든다. 내가 찍힌 대회 동영상을 보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못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정말 괴로웠다. ‘왜 이제 시작을 했나, 나의 피지컬은 왜 이것밖에 안되나.’ 불평을 늘어놓아봤자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언어를 하나 배우면 내 머리에 눈이 하나 더 생긴다고 나의 은사님이 말한 적이 있었다.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분야이든 깊게 들어가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열리기 시작하니 부족한 내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이제 우리의 목표를 우승을 지키는 일이다. 앞으로도 우승을 몇 번 더 해내야 한다. 이제 1년이 지난 초짜는 아직도 필드를 바라본다. 팀이 우승하는데 내 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지나가는 감정일 뿐이다. 못하는 실력을 감정에 연결시키는 것뿐이다. 그 연결을 끊어버리겠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것이다. 무쇠의 뿔처럼.



+우승 뒤에 오는 쓰나미가 더 무서운 요즘입니다. 축하해주는 사람들 속에서도 정치적인 색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추워져서 운동이 게을러집니다. 겨울방학 때는 어떤 일들이 있을지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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