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낯선 공간의 메타포, 自影

송인필 · 목영해

by 김지숙 작가의 집

송인필 · 목영해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곳은 공간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으로 구분되며, 우리는 이들 두 공간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가시적 공간에는 흙 물 공기 식물 동물 광물 등이 있으며, 비가시적 공간은 인간의 내면에서 경험이 가능하며 신체와 인격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시공간 안에서 변화하며 후자의 경우는 비선형성을 지닌다. 오늘날 이 두 공간(space)의 경계는 흐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공간은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살만한 장소(place)로 바뀌어 간다.(Kastern Harris 1982)

한편, 인간의 몸은 소우주로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의 섭리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형체를 지닌 존재로 가시적인 공간과 비가시적인 공간을 동시에 보고 느끼는데 이는 인간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느끼고 경험한 에너지들이 주변 환경과 더불어 체득된 언어로 만들어 낸 사유의 결정체가 바로 시이다. 따라서 시에 나타나는 공간이 인간의 내면에서 상호작용을 거쳐 장소로 인식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사유가 덧붙여진다.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사유하면서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어느 틈엔가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와 닮아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거나 혹은 공간을 닮아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가시적 공간에서 비가시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힘은 자신과의 내재적 만남의 정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보이는 부분을 더욱 세심하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읽어내는 눈, 그리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시를 읽었다. 시에서 가시적 공간은 물론 비가시적 공간으로 대표되는 내면적 공간 역시 체험 사건 시간 의미 등과의 상호관련성 속에서 복잡하고 치밀한 사유와 더불어 표현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에스프레소 검은 피가 내 혀를 적신다. 목젖 깊이 식도를 적시고 갈비뼈를 헤집는다. 나는 네가 스며들기 좋도록 순백의 앞단추를 풀어 길을 튼다 슬픔이 울컥거린다. 무겁고 깊은

너의 중심과 내 중심이 합쳐 숨길 틀 때, 네가 너를 나에게 버릴 때, 내가 네 속에 나를 버릴 때,우린 공배의 빈 점이다.

낮달 걸린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오래 골목을 흘러갔던 사랑으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네 눈을 검은 피로 적셔줄게, 네 귀를 적셔줄게, 네 살을 발라 근사한 무덤을 지어줄게, 어차피 죽음의 길, 에스프레소 검은 피가 내 등줄기를 타고 발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수천의 실핏줄 예민하게 뜨고 까무라치는 한나절 누가 나를 허물었나봐, 너의 검은 피, 허물어진 빈 집의 뒷맛이 쓰다

-송인필, 「바둑, 낮달 걸린 카페」


인간이 공간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단 하나의 감각은 ‘특별한 장소에 대한 감정(Michael Leonard 1969)이다. 이러한 특별한 장소감은 필연적으로 인체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며 오랜 세월 속에서 체화되고 각인된다. 송인필의 시 「바둑, 낮달 걸린 카페」에서 화자는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카페라는 낯선 공간은 사라지고 화자는 에스프레소와 하나가 되어 간다. 에스프레소는 화자의 눈 귀 살 피 발가락의 순으로 화자의 몸을 적시고 특히 화자의 눈은 인식의 중심이 되어 사물을 꿰뚫어 보기에 이른다.

한편, 오른 눈은 미래를 왼눈은 과거를 그리고 전면을 보는 눈은 현재와 상응한다.(이승훈 1995) 화자의 인체가 에스프레소를 각성하는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살에서 실핏줄에 이르며, 이는 시간적 흐름이 감안된 채 화자의 정신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스며들’다가 ‘합쳐’지고 ‘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에스프레소는 화자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 화자에게 피 귀 살이 되는 일체의 과정을 끝으로 화자 속으로 사라진다. 카페라는 가시적 공간에서 화자는 에스프레소와 자신 간의 일체감을 음미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비가시적 공간인 화자의 내면을 향해 치닫다보니 카페라는 가시적 공간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은밀하고도 특별한 ‘화자의 몸’이라는 장소로 바뀐다.

르네 궤농 (Rene Guenon에 따르면 인간은 구조적 특성으로 카발라(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지혜)의 장소이자 내적 장소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화자의 경우, 만물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실재(Reality)에 다가가는 정신적 접근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는 가시화된 공간에서 비가시화된 내면적 장소로 이동하면서 화자는 환상과 더불어 인체를 각성하고 화자의 몸은 에스프레소의 죽음과 화자의 삶이 공존하는 장소로 기억한다. 즉 카페라는 낯선 공간에서 화자가 마시는 ‘에스프레소’라는 메타포를 통해 비가시적인 공간인 내면으로 향하는 친밀한 장소로서 가서 자기 몸을 느끼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히 자각하는 장소가 된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이 슬픔이면

꾸역꾸역 내려가는 것은 밥

밥의 힘으로 삼켜버린 슬픔

지금은 무른 지방질 되어

내 살의 어느 단층을 이루고 있겠지

봄날 꽃잎이 밥알인양 흩어진다

속모를 슬픔이 창자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리라

슬픔도 살아가는 일의 한조각

그래 먹는 것이 좋겠지

비극 드라마의 시청률이 더 높다는데

애잔한 발라드 곡의 인기가 더 좋다던데

견고한 슬픔일지라도 곱게 바스라지게 꼭꼭 씹어

맛있게 먹는 것이 좋겠지

꾸역꾸역 올라오는 슬픔이래도

밥과 함께 꾸역꾸역 다시 내려가기에

세 번만 삼키면 하루해가 가고

지나는 세월은 약이기에

밥 먹을 힘만 있으면

견디지 못할 슬픔은 없다

-목영해 「슬픔」



인간은 다양한 체험으로 혹은 타인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관계에 적합하고 이를 충족시킬 공간으로 만들어 살아간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은 바로 ‘자신의 신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Yifutuan 2007)는 의미이기도 하다. 목영해의 시「슬픔」에서 화자는 슬픔이 목구멍으로 치올라오지만 ‘밥의 힘’으로 그 슬픔을 삼키다보니 어느 틈엔가 그 슬픔은 ‘살’이 되고 ‘꼭꼭 씹’다 보면 ‘견디지 못할 슬픔’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확신은 화자 스스로 자신의 신체 반응에 적응하려는 현상으로 보인다. 화자의 낯선 슬픔이 어디서 왔던지 간에 화자의 몸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화자는 내면의 슬픔을 다시 눌러 삼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화자에게 주어진 슬픔을 극복한다. 또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 간다.

시에서 화자의 몸과 슬픔은 서로 ‘안정 애착관계’(Jeremy Holmes 2005)를 형성한다. 이러한 종류의 애착관계는 인간이 어떤 신체적 욕구를 느끼거나 환경적 위협을 받을 때 대인관계 문제를 경험할 때 발생한다. 시에서는 화자는 짙은 슬픔을 느끼지만 하지만 화자는 가시적 공간에서 밥을 먹으며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반복적 행동을 하는 행위들을 ‘살아가는 일의 한 조각’으로 여긴다. 자신의 몸으로 슬픔을 체화시키고 일상화하는 과정에서 비가시적 공간을 형성하는 내면의 자기 그림자인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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